장세진 인하대 교수 / 본지 전문위원

불행히도 우리의 언론은 공정한 보도로 명성이 높지는 않다. 언론사 간에도 편파, 왜곡 시비가 끊이지 않는 것이 반증이다. 아마도 언론인들의 계몽주의적 사고, 즉 어리석은 독자 대신 옳고 그름을 대신 판단해 주겠다는 충정이 다소의 왜곡을 정당화하고 있는 듯도 싶다. 아니면, 언론이 독자가 왜곡과 편파를 걸러내고 진실을 추론하도록 지적 훈련을 베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언론의 정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면, 그 왜곡을 식별해내고 진실과 정의에 다가가는 첩경은 무엇일까? 가장 단순한 방법은 인용에서 “말했다”라는 중립적인 표현 대신 “밝혔다”와 “주장했다”를 사용하는 횟수를 세는 방법일 것이다. 이들의 비중이 높을수록, 진실의 왜곡을 기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기자는 독자로 하여금 “밝혔다”고 인용된 말을 신뢰하고, “주장했다”라고 인용된 말을 의심하도록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밝혔다” 대신 “설명했다”, “강조했다”라고 하거나, “주장했다” 대신 “변명했다,” “억지를 부렸다”는 표현도 사용된다. 권위 있는 영자 신문들은 오직 “말했다”(said)만을 사용하며 판단은 독자에게 맡긴다. 이 셈법을 확장하면 설득적 개념, 즉 어휘 자체에 이미 감성이나 가치판단이 개입되어 있는 개념들을 얼마나 사용하는가에 따라 왜곡의 정도를 계측할 수도 있다. 진실을 왜곡하고 독자를 유도하는 오래된 방법의 하나는 반대하고자 하는 의견을 경직적으로 해석하고, 자신의 의견을 탄력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행복은 꼭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도 그 응용의 하나이다. “학업에 성실한 것이 대체로 미래에 좋은가” 대신 “행복,” “성적,” 또는 “꼭”이라는 말로 경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꼭, 반드시, 절대로, 항상 등의 부사가 붙으면, ○× 문제의 답이 ×라는 것은 초등학생도 알고 있다. 이를 겹으로 사용하여, “당신이 모든 것을 잘했다고 할 수 있어요? 또 내가 나쁜 짓만 했다고 할 수 있어요?”라고 항변할 수 있다. 같은 방식으로, 90점의 당신 정책보다 10점의 내 정책이 우월하다는 착각을 유도할 수도 있다. 유추를 이용하는 것은 또다른 왜곡의 방법이다. 우리는 1, 2, 3의 숫자가 나오면 다음에는 4, 5가 나올 것으로 유추한다. 이러한 유추는 우리의 부족한 지성을 보완하는 구실을 한다. 그렇지만, 이를 이용하여 어떤 사물의 좋은 점 또는 나쁜 점을 서너개 정도 열거하면, 그 다음은 무한히 많이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기실 그것이 전부라도 말이다. 점술가나 사기꾼이 애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같은 방식으로 전체를 말하지 않고 부분을 열거함으로써 상대방을 빨갱이 또는 친일파로 몰 수도 있다. 어떤 말을 하고 있는가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어떤 말을 하지 않는가이다. 흔히 사용되는 방법은 자신에 유리한 사실들만 열거하고, 불리한 사실들을 아예 언급하지 않는 것이다. 약이나 상품광고에 애용되는 방법이다. 정부가 어떤 정책의 혜택을 열거하면서, 그 비용이나 재원의 조달방법을 언급하지 않는 것도 이에 속한다. 결혼중매인이 배우자의 재산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면, 왜 나이나 건강을 이야기하지 않는지에도 의아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당연히 언급되어야 할 것이 언급되지 않을 때, 우리는 언론의 왜곡을 의심하여야 한다. 왜곡의 방향을 미리 짐작하는 것도 왜곡을 수정하는데 도움이 된다. 여당지냐 야당지냐에 따라 편향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문제라면, 편향을 의심하여야 한다. 학자의 말이라고 그냥 믿을 수는 없다. 멋있게 보이는 주장을 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편향을 보정하기 어렵다면, 입장을 달리하는 두 매체를 비교하는 것이 좋다. 극악범의 재판에도 검사와 변호사가 필요하다. 원래 싸움에서의 판단도 한 쪽의 주장만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오래된 선조의 지혜가 아니었던가? 독자들의 현명한 판단만이 갈등의 시대를 마감할 수 있기에 새삼 되뇌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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