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동국대학교 홍기삼 총장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본의 아니게 물의를 일으켜 총장님과 동국대학교 동료 교수님들, 그리고 열심히 미래를 위하여 공부하는 동국대학교 학생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편지에서도 밝혔듯이 물의를 일으킨 장본인은 내가 아니라 조선일보이고, 조선일보의 무식한 주장을 그대로 받아 “얼치기 삼류”는 대학을 떠나라고 성명서를 발표한 한나라당이다. 나는 최소한의 양식이 있는 언론인이나 정치가들이라면 스스로 잘못 판단했다는 것을 알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첫 번째 글이 발표된 이후에 그것을 기사화한 조선일보의 탁상훈 기자와 가장 먼저 인터뷰하고, 그것과 똑같은 내용의 인터뷰를 이곳 조하네스버그에 있는 연합통신의 기자와 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강정구 교수에 이어 장시기 마녀사냥에 나섰다. 한나라당은 또 다른 성명서를 발표하여 나를 “미국을 싫어하는 영문학자”라고 부르면서 마녀사냥에 불을 지르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들의 하수인들이 나를 국보법 위반 혐의로 고소를 했다. 당신들은 내가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하여 언급한 것을 문제로 삼는다. 그러나 나는 김대중과 노무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왜, 그것은 문제를 삼지 않는가? 당신들은 김일성과 김정일보다도 김대중과 노무현을 더 증오하지 않느냐? 그들이 대한민국의 전직과 현직 대통령이기 때문인가? 당신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합의한 “6.15 남북공동선언”을 최소한도 인정하지 않지 않느냐? 노무현 대통령 또한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고 하루라도 빨리 대통령의 자리에서 쫓아내는 것만을 고민하지 않느냐? 그것이 바로 제국주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소인배 정치, 남을 죽이기만을 고민하는 식민지 노예의 글쓰기이다. <삼국지>를 읽어보아라. 제갈공명과 조조는 서로 피투성이의 싸움을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위대한 지도자라고 부르고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지 않느냐? 350년 동안 흑인들을 노예로 삼고 수십, 수백만 명의 흑인들을 죽인 백인 정권의 마지막 대통령 클러크와 만델라가 노벨 평화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는데 제국주의 싸움의 과정에서 분단된 같은 민족 한반도의 북측 지도자는 노벨평화상을 받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당신들은 나를 “제 2의 강정구”라고 부른다. 그러나 지난 해 성균관대에서 있었던 <6.15 남북 공동선언> 4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나는 강정구 교수와 근대적 통일론과 탈근대적 통일론에 대한 학술적인 논쟁을 한 적이 있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서열구조의 파쇼적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우리 학자들도 그런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들은 서로 학술토론과 논문을 읽으면서 논쟁을 하기도 하고 자신의 견해를 바꾸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결코 견해가 다르고 사상이 다르다고 해도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고 하거나 음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의 첫 번째 글은 강정구 교수의 사상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이 죽이려고 하는 강정구 교수를 살리기 위한 글이다. 현재의 나는 근본적으로 글을 쓰고 말하는 것을 나의 책무라고 알고 있는 문학평론가이고 문학이론을 공부하는 학자이다. 따라서 나는 “그 무엇을 위하여, 그 누구에게 동의하는” 글쓰기를 가장 기본적인 원칙으로 삼고 있다. 두 번째 글은 사람을 살리는 정치가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정치를 하는 한나라당의 몇몇 식민지와 독재에서 벗어나지 못한 수구세력과 남을 비난하고 죽이려는 글만 쓰는 조선일보의 몇몇 수구 논객들이 정신을 차리라고 쓴 글이다. 나는 일본을 사랑한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는 증오한다. 나는 미국도 사랑한다. 그러나 부시와 같은 미국 제국주의자들은 미워하고 증오한다. 나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민주화에 성공을 하고 개혁을 통하여 미래로 나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을 너무나도 사랑한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와 미국 제국주의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아류 제국주의자들을 싫어하고 미워한다. 그러나 그들도 대한민국 사람들이기 때문에 나는 그들마저도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이 제발 죽이는 정치가 아니라 살리는 정치를 하고, 죽이는 글쓰기가 아니라 살리는 글쓰기를 하고, 사람을 감옥에 가두거나 교수직에서 내쫓는 검찰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로 거듭나는 검찰이 되기를 바란다. 민주노동당의 조승수 의원 사건을 보라. 조승수 의원은 나의 대학교 동기동창이다. 그는 아주 당당하게 울산의 시민과 노동자의 친구가 되어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돈을 펑펑 쓰고 사조직을 동원한 국회의원들은 버젓이 국회의원 노릇을 하는데 그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국회에서 쫓겨났다. 나는 그를 위하여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도 가슴 아프다. 나는 당신들이 죽이려는 그를 위하여 글을 쓰고 위로의 말을 전달할 뿐이다. 그렇다고 제발 제 2의 조승수라고 말하지는 마라. 내가 이야기하는 탈근대성은 만해 한용운 선사의 사상이요 백범 김구 선생의 정치철학이다.(만해 한용운의 시에 대한 논문은 지난 “만해축전”에 발표하였다. 찾아서 읽어보아라.) 그들은 근대에 살았으면서도 근대의 망령에 사로잡히지 않고 탈근대적인 삶과 사상을 실천하다가 불운한 삶을 마쳤다. 일본 식민지 제국주의와 한반도의 남북분단이 그들을 불운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그들과 같은 불운한 사람들이 이 한반도에서는 존재하지 말아야만 하지 않는가? 만해 한용운과 백범 김구가 일본 제국주의의 앞잡이였느냐, 아니면 미국 제국주의의 꼭두각시였느냐? 만해 한용운과 백범 김구가 한반도의 남측 편이였느냐 북측 편이였느냐? 만해 한용운의 사상과 백범 김구의 정치철학은 이제 세계적으로 만연하고 있다. 그것을 일반적으로 탈근대의 철학, 혹은 탈근대의 노마돌로지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보수/진보의 근대적 이분법에 따라 나를 보수주의자이거나 진보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한다. 굳이 나를 규정하자면 나는 나 자신을 탈근대주의자, 여성주의자, 혹은 생태주의자라고 부르고 싶다. 싸우는 것만을 일삼는 당신들이 그것을 알 리가 만무하다. 모르면 배워라.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모르면서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남을 죽이려는 것은 죄다. 당신들이 나에게 배우러 온다면 소주에 감자탕을 사주면서 가르쳐주겠다. 당신들을 특별히 대우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학생들에게 그렇게 한다. 나는 이제 이 사건에 대하여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겠다. 처음의 글도 강정구 교수에 대한 애처로움을 전달하기 위하여 쓴 글이지 대한민국의 정치적 상황에 참여하기 위하여 쓴 글이 아니다. 비록 1년의 짧은 세월이지만 나는 지난 갈등과 대립의 세계에서 벗어나 이곳 남아프리카의 아름다운 자연과 흑백남녀노소를 구별하지 않는 탈근대의 문화와 지식을 즐기고 싶다. 어느 정도 정착이 된 나의 생활은 지난 일 주일 동안 엉망진창이 되었다. 나는 나의 생활을 되찾고 싶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자면 지난 번 글에서 표현하였듯이 고여 있는 물은 썩는다. 물이 흐르듯이 세상도 흐른다. 이 세상에 영원히 절대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조선일보와 한나라당도 변할 것이라고 믿는다. 썩은 물속에 있는 최소한 하나나 둘의 맑은 물이 흐르게 하면 썩은 물도 소생하게 된다. 그 소생의 시대에 맑은 물이 된 조선일보와 한나라당도 참여하여 투쟁과 갈등의 분단국가가 아니라 아름다운 한반도를 만드는 주인이 되기를 바란다. 그 길 중의 하나는 정치와 언론, 그리고 검경도 각각의 자정 능력을 지닌 개체이듯이 대학이나 학자들의 세계도 스스로 자정 능력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당신들과 달리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는, 이미 우리들 눈앞에 다가와 있는 희망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천명하지만 나는 식민지나 독재의 과거가 아니라 민주화와 개혁을 통하여 미래로 나아가는 대한민국 국민이요 남북의 구별이 없는 코리안(한반도인)이고 아시아인이며 탈근대로 나아가는 세계인이다. 이것을 한 마디로 “노마드”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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