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광식 (상지 컨설팅 회장/본지 논설위원)

서울대 총학생회가 한총련과의 이별을 선언했다. 정치적 이유가 있어 그런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뜻을 받아들여 그렇게 했다는 것이 서울대총학생회장의 말이다. 한 보수적 신문은 이 대학 사회의 변화를 무척이나 긍정적으로 보도했다. 그런가 하면 진보적인 한 신문의 사설은 '호들갑을 떨 일이 아니다'라는 표현으로 비꼬았다. 이 두 반응이야말로 '한총련의 위기'의 본질을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총련이라는 학생운동의 기본 축이 어떻든 도마 위에 올려진 것은 그 존폐를 운위할 시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돌이켜 보면 현대 학생운동의 불꽃이 올려진 것은 4.19다. 이 학생운동의 뿌리는 남북분단과 군사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면면히 이어져 어언 50년을 바라보게 되었다. 하나의 이포크 메이킹이 일어날 시간적 요소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학생운동이 표적 삼았던 반민주 군사독재 남북분단이라는 거대하고 견고했던 콩크리트 담벽이 시대의 거센 물결에 붕괴되었거나 붕괴되고 있어 이제 그들의 '이념적 적군'은 쇠약해져 있다. 가열찬 저항의 몸짓으로 폭력까지 불사했던 열정이야말로 더 큰 폭력에 대한 대항일 때 설득력이 있고 빛이 난다. 한총련이 겨냥했던 그 완강하고 무수한 폭력의 구조들은 이미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운동에 참여했던 각 세대는 지난 50년 동안 한국이라는 공간에서 '혁명의 실험'을 했다. 4.19 제1학생세대는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실험 했다. 반군사독재의 제2세대는 숱한 피를 흘리면서 민주화의 대행진을 강행했다. 반미의 제3세대는 민족 이데올로기의 깃발을 흔들며 남북 갈등을 완화시켜 왔다. 그리고 이 학생운동은 시대의 흐름을 이끌면서 한국이라는 나라의 '국가적 성취'를 이루어 왔거나 이루어 가고 있다. 학생운동사를 큰 눈으로 본다면 성공한 50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한총련과의 이별을 단순히 폭력 단체와의 이별이라는 눈으로 보는 것은 지성적판단이 아니라 정치적 판단이다. 그러나 지성적 판단을 하더라도 한총련이 다시 살아날 기류는 없다고 본다. 학생운동은 두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다. 제도권이 변화에 완강하고 폭력적일 때다. 그리고 암울한 시대를 혁파할 사회운동의 동력이 부족할 때다. 더 부패하고 더 폭력적이고 더 완강하고 민중은 현실타파에 힘을 잃고 있을 때야 말로 학생운동이 빛난다. 청와대와 여의도 의사당에 386세대가 포진하고 있는 정치 환경은 이미 '거대한 적진'이 함락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싸운다는 사실은 이제 미묘한 표현이지만 제도권을 장악한 자기들 끼리의 문제가 되어버린 형국이다. 민족 이데올로기나 반미의 메시지를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제 거의 없다. 고독한 이념의 투사들의 몫으로 남아있는 게 민족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이미 대중화가 되어 버리고 공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학생운동의 표적이되는 억압구조나 폭력의 구조는 워싱턴만 짜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이제는 공공연해 졌다. 바로 북한과 북한체제다. 북한의 빈곤과 반민주와 폭력정치라는 '거대한 힘'에 학생운동이 대항할 수 있는가. 그것은 국제사회와 국가가 할 일이다. '한총련 굿바이'에는 반폭력의 시대심리가 있다. 이미 거대한 목표물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흐름에서 저항과 반항은 돌맹이와 함께 시위 현장의 잔해처럼 폭력만 남게 된다. 메시지는 폭력에 묻혀사라진다. 이번 선언이 학생운동의 소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른바 정-반-합의 논리에 따라 제4기 운동은 '합의 시대'를 이끌었으면 싶다. 시대심리는 '결사반대'에 지쳐있다. 변화를추구했던 학생운동이 지금 위기에 처하고 여기 저기 대학가에서 '한총련 굿바이'를 서언하는 것은 변화의 주체가 변화의 물살이 도도한 시대에 스스로 변하지 못한데서 오는 비극이다.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