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선택권은 소비자에게"

본지가 창간 19주년을 맞아 작가 복거일씨와 문학평론가 이명원씨의 대담을 마련했다. 문학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는 두 대담자는 한 사람은 보수논객으로서, 다른 한 사람은 비평을 통해 세상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이번 대담은 우리나라의 고등교육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대학 외부의 시각에서 점검해보자는 취지로 마련됐다. 이들은 대학에 몸담고 있는 전문가 못잖은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드러내며 연령차를 뛰어넘는 열정적인 토론을 보여줬다. 대학의 기원에서부터 총장직선제 문제까지 여러 주제를 넘나들며 진행된 이번 토론은 이따금 대학 구성원들에 대한 거침없는 질타로 이어졌다. 대담은 지난 21일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홀리데이인 서울 커피숍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으며 별도의 진행자 없이 이명원씨가 질문하고 이에 대해 복거일씨가 자신의 생각을 얘기한 뒤 상호 토론했다.


복거일 : 1946년 충남 아산 출생.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고 기업은행과 한국과학연구원 선박연구소 등의 직장생활을 거쳐 87년 가상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로 등단. 현재 뉴라이트재단 기관지인 ‘시대정신’ 편집위원과 보수적 문화예술인의 모임인 문화미래포럼 대표를 맡고 있음. 1998년 저서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영어 공용론’을 처음으로 제기. 지은 책으로 <높은 땅 낮은 이야기>, <역사 속의 나그네>, <파란 달 아래>, <캠프 세네카의 기지촌>, <그라운드 제로> 등 다수.


이명원 : 1970년 서울 출생. 서울시립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 성균관대에서 박사과정을 수료. 199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학비평가로 등단. 1997년 제2회 상상비평상 수상.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부 교수로 재직했으나 학내 민주화 문제를 언론에 기고했다는 이유로 1년만에 해임. 현재 젊은비평가 모임 ‘포럼X', 지행네트워크 연구위원으로 활발한 비평활동을 펼치고 있음. 지은 책으로 <타는 혀>, <해독>, <연옥에서, 고고학자처럼>, <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등 다수.

* 복거일 이하 (복), 이명원 이하 (이)로 표기.
 
복 = 모쪼록 대담이 원활하게 이뤄지려면 여러 가지 주제를 논의하지 말고 몇 가지 주제에 대해 깊이 있게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 단문 단답으로 이뤄지면 대담이 힘들어진다. (웃음) 이 교수와는 문학이란 공통분모가 있어 좋은 것 같다. 대담도 양쪽이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맞아야 원활해지기 때문이다. 예전에 대학 후배이기도 한 김근태 의원과 대담을 했었는데 김 의원은 성격상 말문이 막히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려 내가 붙잡느라 혼이 났었다. 정치가가 소설가를 잡아야하는데 소설가가 정치가를 잡는 모습이 연출됐다.

이 = (웃음)요즘 대학 관련 뉴스치고 좋은 내용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오늘날 한국 대학이 처해있는 상황이나 문제점에 대해 평소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복 =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의 교육체계가 사회의 운영원리에서 가장 많이 벗어난 분야라고 생각한다. 이 사회는 시민들이 자유롭게 결정하고 활동함으로써 개인들의 이익이 지켜지고 효율을 높이는 체계다. 그런데 교육 분야는 정부가 시민들의 결정과 행동을 적극적으로 제약하고 있다. 체제의 운영원리와 어긋나는 정책이 오랫동안 시행되다 보니 갖가지 부작용을 일으킨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불거지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은 결국 교육 분야가 부진한 데 원인이 있다. 정부가 교육에 지나치게 간섭해서 시민들의 선택과 활동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선택권 주지않고 투자해봐야 낭비

이 = 우리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는 정부가 바뀔 때마다 교육정책이 달라져 교육이념을 훼손하는데 있는 것 같다. 고등교육의 경우 더 심각하다. 정부가 BK21(두뇌한국 21 Brain Korea 21의 약칭)이라는 대규모 공적자금이 투입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는데 최근 언론보도를 보면 문제점이 적지 않다. 국제적인 규모의 논문이 양적으로 팽창하고는 있지만 세계 학회에서 거의 인용되지 않는단다. 교육정책이 양적인 축적과 비대화에 집중하고 있어 폐단이 생기고 있다.  

복 = 정부가 교육을 독점적으로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국민들은 여기서 벗어나기 힘들다. 어릴 때 유학을 보내지 않는 한 체제를 따라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런 여건에서는 폐단이 나올 수밖에 없다. 교육의 소비자인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선택권이 주어져야 한다. 정부 규제를 해소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면 나아질 것이다.


이 =
교육을 서비스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정부가 소비자 위주의 교육정책을 펴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는 달리 봐야 할 것 같다. 오히려 고등교육을 과도하게 개방해서 나타나는 문제점이 더 심각하다. 수요와 공급의 문제가 그렇다. 대학 입학자 수가 80년대보다 4배 이상 팽창했고 90년대 당시 4년제 대학 재학생이 80~90만이었지만 지금은 180만이다. 이는 정부가 수요자 중심으로 교육을 재편하고 특히 사립대 위주로 정원을 팽창시키는 등 자율화시키고 규제를 철폐했기 때문 아닌가. 지금은 고등교육이 그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많은 대졸자가 청년 실업을 경험하고 있고 전반적으로 고등교육의 질 저하도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박사과정도 1년에 만 명 이상씩 배출되는데 이들 또한 고급실업자로 전락하고 있다.


복 =  교육에 대한 투자는 늘어나는데 성과가 낮은 것은 초중등 교육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어서 고등교육에만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된다. 초중등교육의 구조적인 문제를 바꿔야 한다. 많은 선진국들이 수행해온 연구 결과를 보면 결국 소비자인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줘야한다는 게 보편적인 결론이다. 그러면 나머지 문제들은 대부분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투자해도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초중등 교육에 대한 투자를 늘리면 그 중 80~90%는 교사나 학습기자재로 투입되고 학생들에게는 10% 정도만 돌아간다. 소비자에게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는 한 이 같은 투자는 낭비에 가깝다. 이는 많은 교육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바다.

선택권을 소비자에게 준다면 당장 성과가 나올 것이다. 교사들로 하여금 독점체제 안에서 안주하지 않고 경쟁하게 하므로 거의 모든 교육문제가 해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권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세계 어디에서나 특히 교육 분야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노동조합 때문이다. 미국에서도 민주당이 미국교사노조 지부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노동조합의 힘이 막강해서 이러한 정책을 쉽게 펼 수 없다. 우리나라는 교사들의 성과를 측정하는 일 마저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생산자의 생산성을 최소한도에서라도 측정해야 하는데 기본적인 게 불가능한 상황에서 어떻게 교육의 발전을 기대할 수는 있겠나.


이 = 교원평가제에 대한 견해를 말씀하셨는데 교원평가가 획일적으로 이뤄지는 것은 다소 위험한 측면이 있다고 본다. 교육현장에서 체험해 본 바로는 평가라고 하는 것이 실제 교원들의 연구나 강의에 있어 순기능을 발휘하기 보다는 인기투표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객관적 기준이 의심스러운 부분이 상당히 있고 평가라는 시스템 자체가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하지만 초중등교원의 경우 연구기능이 없고 일방적인 강의 중심으로 교사로서의 정체성을 규정하다보니까 자기 성찰이 미약해지는 부분도 없지 않은 것 같다.

논의 방향을 전환해서 요즘 대학 사회에서는 교수노조에 대한 상당한 시각차가 존재한다. 교수가 어떻게 노동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입장에서부터 한국의 교수가 처한 현실이 일반 노동자와는 다르나 대학교육의 공공성 때문이라도 노조를 합법화할 필요가 있다는 시각 등등이 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교수노조 문제, 본질을 봐야


복 = 교수가 노동자인가 아닌가 하는 부분부터 얘기하자면 사실 모든 사람은 노동자이기 때문에 교수도 마찬가지다. 자기 몸을 움직여서 재화를 생산하므로 생산물이 재화든 지적생산물이든 서비스든 다 똑같다. 지식인들은 지식을 생산하기 때문에 우월감을 느끼곤 하지만 이것도 당연히 노동의 결과물이다. 애초에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교수라는 직업이 추앙받는 직업이기는 하나 그것도 당연히 노동으로 봐야 한다. 원칙적인 얘기여서 논의의 여지도 없다. 다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노동조합이 왜 필요한가 하는 문제다. 노동조합은 노동의 공급을 독점하는 제도이다. 독점은 자유시장 경제체제와 어긋난다. 교수노조 문제처럼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노동조합이 과연 적합한가 하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문제는 과연 노동조합이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제도인가 하는 성찰일 것이다. 교수라고 하는 지식인들이 교수가 노동자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란을 벌일 때가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성찰과 논의로 이어져야 한다.

이 = 선생님의 답변이 좀 뜻밖이다. 뉴라이트 쪽 단체에서는 교수노조에 대해 교수지위에 관한 법률 등을 들어서 적절치 않다는 주장을 하는데 그보다 진일보한 생각들을 들을 수 있어 조금은 기묘한 느낌이다. 하지만 노동조합이 자유민주주의에 적대적이라고 말씀하신 부분은 좀 다른 입장이다. 선진 국가들의 경우 노동조합이 기업의 경영에 참여하는 등 보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참여하고 있지 않나.

복 = 노동조합 자체가 지닌 문제를 얘기하는 것이다.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시장경제를 유지하는 사회에서는 노동조합은 원리에 어긋나는 제도이다. 노동조합이 생긴 것은 자유주의 원리에 어울려서 나온 것이 아니라 특수한 상황 하에서 현실적인 문제들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을 사후에 정당화 시키다 보니까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노동조합은 자유시장경제에 맞는 모습으로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헌법에 노동조합이 규정돼 있어 이를 고치지 않는 한 진화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때문에 일단 원론적인 수준에서 이에 대해 먼저 논의를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우리사회는 현상적인 문제에만 집중하고 그 뿌리가 되는 원리적인 문제까지는 성찰이 미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과연 독점체제를 대학 사회에까지 도입해야 하는지 고민해 볼 수 있도록 논의가 확장되면 환영할 일이지만 교수가 노동자냐 아니냐 하는 논란에서 애기가 끝나면 지엽적인 수준에 머물고 만다.

이 = 노동조합 구성력이 전체 기업의 20%가 채 안 되는 게 현실인데 이를 독점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직까지는 노동조합이 사회적으로 약자의 입장이라고 본다. 하지만 노동계나 진보세력에서도 노동조합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데는 동의하고 있다.

대학문제로 돌아가서 대학 사회의 민주화 요구에 따라 총장 선출 방식도 직선제가 우세한 양상을 보이다가 최근 국공립대의 경우 임명제로 전환하거나 사립대는 이사회가 선임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고 있는 변화가 감지된다. 이에 대해 교원들 사이에서도 견해차가 노출되고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는지.


대학의 이기주의 심각

복 = 총장 직선제는 경영 원리에 어긋나는 우스꽝스러운 제도이다. 교수는 대학의 종업원이다. 종업원이 사장을 뽑아서 운영하겠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기업은 소유자인 주주들이 이사회를 구성하고 이사회가 경영진을 뽑아서 책임 운영하도록 하는 체제다. 그런데 종업원이 사장을 뽑겠다고 하면 그 회사가 제대로 운영이 되겠나? 원리에 어긋나므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모든 세상 이치가 순리를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대학의 소유권은 국립은 정부에 있고 사학은 출자한 재단에 있다. 당연히 이들이 사람을 뽑아야 한다. 종업원이나 다름없는 교수들이 총장을 뽑는다는 생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쁜 형태의 ‘포퓰리즘’(pupulism : 일반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형태)이다.

특히 국내 대학에는 경영학 교수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직선제가 경영원리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는 교수가 없다. 경영학 교수라면 당연히 경영원리에 어긋난다고 얘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면서 기업의 지배구조를 선진화할 것을 주장하고,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얘기한다면 설득력이 없다. 중등교육 이하의 생산자인 교사는 정부가 보호해주니까 직접적으로 이익을 추구하지 않아도 되지만 대학은 그렇지 않아서 교수들이 암묵적으로 직선제를 통해 이를 탐하게 된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총장이 되기 위해 교수들, 젊은 강사들에게 표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대학에서는 학자들의 품위가 떨어졌다는 애기까지 나온다. 그렇게 선출되면 그 사람들의 뜻에 따라 대학을 운영해야 하고 자신의 소신이나 교육정책에 대해 운영할 수 없다. 대학은 중소기업도 아니고 대기업이다. 그런데 조직을 보면 원시적이다. 대학이 이에 대해 반성한 적이 있나. 대학을 대표하는 교수들은 이러한 상황을 암묵적으로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신정아 파문을 보더라도 그렇다. 대학조직이 얼마나 느슨하고 부정이 생길 여지가 많은가. 피해자는 학생들이다. 가짜 학위를 가진 교수의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에게 고스란히 피해가 간다. 대학에서 교수들의 집단 이기주의가 가시지 않는 한 대학 교육의 희망은 없다.


이 = 선생님께서는 자유주의자, 시장주의자이기 때문에 대학은 기업과 같고 대학총장은 기업의 CEO라고 보는 것 같다. 하지만 대학의 기원이라고 하는 것은 이탈리아의 경우 학생조합, 파리대학은 교수조합에서 출발했다. 교육의 주체와 객체 모두가 대학의 경영과 커리큘럼을 자체적으로 만든다는 것인데 오늘날 대학이 기업의 이념에 종속되면서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한 것은 아닌가. 교육을 공공서비스라고 볼 때는 더욱 그렇다. 사립대의 경우 대학에 투자 자체가 이뤄지지 않고 전입금이 불어나도 교육 전입금은 등록금으로 메우는 수준이다.

복 = 대학의 기원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중세는 대학이 길드(Guild : 중세 유럽의 동업자 조합)의 형태로 출발했다. 애초부터 이익을 추구한 집단이다. 옥스퍼드, 캠브리지 다 독점적인 길드 형태다. 하지만 지금의 자유주의는 독점을 막겠다는 시스템이다. 대학이 운영하는 연구소는 순수한 지식을 생산하는 곳이어서 시장에 나가기 힘든 측면이 있지만 대학은 교육을 담당하는 곳이고 교육은 공공재가 아니다. 교육은 산업이다. 그래서 시장이 정부보다 더 잘 만들 수 있다. 왜 대학만은 중세의 길드체제를 유지해야 하는가.

이 = 왜 길드체제를 유지하게 됐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나. 종교권력과 봉건적인 절대 권력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해서 만든 게 학생조합, 교수조합 아닌가. 자유를 추구하는 대학을 선생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이다.


복 = 중세는 종교와 정치권력이 막강해서 당시 상황에서는 길드가 가장 나은 것인지 모르지만 원리 자체는 그게 최선은 아니다. 사회가 변했으니 대학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학에 변화의 조짐이 없다. 교수 밑에서 지도받고 학위를 받는 것만 보더라도 그렇다. 시장의 체제를 적용할 수 없는 곳이다. 우리 사회는 실력이 있어도 학위가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 이 시스템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대학원생들이 교수의 종이라고들 하지 않나. 어느 기업에서 신입사원이 사장으로부터 비굴한 처우를 받나. 반면 대학에서는 임금은 고사하고 개인 심부름에 평생 사부로 모셔야 한다. 어긋나면 사회에서 파문당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게 중세 시스템이다. 이것은 당연히 깨뜨려야 한다. 한 대학에서 파문당하면 다른 대학서도 안받아주고 국내에서 파문당하면 외국으로 나갔다 와도 힘든 상황이 된다. 중세 조직을 그대로 운영해서 그것이 최선이라고 학생들에게 계속 가르치고 있다. 이것을 깨우쳐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선택권을 줘야 한다. 대학의 본 모습은 유럽의 중세 대학을 볼께 아니라 아테네의 대학을 본받아야 한다. 논쟁과 토론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는 모습, 요즘의 대학은 새로운 학설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지 않나.

이 = 일리 있는 지적이다. 공감하는 문제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교육서비스라는 측면의 문제를 한가지 더 살펴보자. 최근 고려대가 전 과목 영어강의를 추진해 눈길을 끌었다. 그런데 국문학 교수에게도 영어강의를 요구한다거나 독일에서 유학한 교수가 영어강의 때문에 공채에서 탈락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등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전개되고 있다. 선생께서는 일찌감치 영어공용화를 제기했는데 이 문제는 어떻게 보는지.


영어강의 다음 세대 위해 희생해야

복 = (웃음). 영어에 대한 성격을 규정할 필요가 있다. 영어는 원래 앵글로색슨족의 언어였지만 이제는 국제어가 됐다. 영어를 세계어로 파악해야 한다. 영어강좌를 늘리자는 주장을 세계어 강좌를 늘리자는 말로 바꾼다면 얘기가 좀 달라질 것이다. 세계화 시대, 공동체화 된 시대에 세계의 공통어로 강의하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당연히 시행착오는 발생한다. 특히 언어가 지적활동을 담는 매개체이기 때문에 이것을 문제 삼으면 논란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고려대와 같은 대학이 먼저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어윤대 전 총장이 저와 비슷한 학번인 것으로 아는데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점이 자랑스럽다. 처음에 누군가는 비난을 받기 마련이다. 이제 괭이로 오솔길 하나 만들려고 했는데 안 된다고 포기하면 나아갈 수 없다. 국문학과 교수에게 영어강의를 하라는 문제는 대학이 획일적인 조직이어서 그렇다. 어느 과는 봐준다고 하면 다른 학과에서 말이 나오지 않겠나. 초반에는 교수들과 학생들이 어려움을 느끼겠지만 차츰 나아질 것이다. 짐작컨대 앞으로는 영어강의를 못해서 문 닫는 대학도 많을 것이다. 지금 영어를 안 하면 당사자들은 편하겠지만 앞으로 10년 후 대학은 힘들어진다는 얘기다. 우리 세대는 힘들고 혼란을 겪겠지만 후손들까지 손해 볼 이유는 없다.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영어강의를 해야 한다. 우리 후배들은 선배들이 닦아온 길 때문에 편하지 않겠나.

이 =
하지만 지식 습득에 있어서는 모국어 모델이 당연히 우선시 되고 실제적으로도 효율성이 있지 않나. 아무리 미국에서 유학을 했다고 하더라도 말하기 부분에서는 원어민의 50~60%에 그친다고 한다. 지금 미국에서는 동아시아 학과들이 생겨나서 한국인 교수들이 한국어로 강의를 한다는데 역설적으로 한국의 국문학과에서는 영어로 강의하는 풍경이 기묘할 수밖에 없다. 영어공용론이 갖고 있는 합리성 문제와 영어를 고등교육에서 활용하는 부분은 좀 지켜봐야 할 것 같다.

복 = 영어공용화는 모국어하고는 관계없다. 태어날 때 아이가 갖는 모국어는 하느님이 점지하는 게 아니라 우연히 결정되는 것이다. 한국인이 미국에서 태어나면 영어를 사용한다. 왜 그걸 운명으로 받아들이나. 부모가 한국 사람이고 그래서 모국어로 한국어를 한다고 하면 그것도 좋지만 어릴 때 영어를 배우면 언어 2개를 할 수 있다. 성장한 뒤 해외까지 나가서 영어를 배운다고 해도 국제 세미나 등에 가면 말 한마디 못한다. 왜 그래야만 하나. 모국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세계어를 쉽게 쓸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실제 그걸 들여다봐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 게 문제다. 바이링규얼(Bi-lingual:2개국어 사용)은 의외로 쉽다. 어릴 때 영어를 가르치면 뇌세포를 따로 만들 필요 없이 영어를 위한 뇌의 경로 하나만 만들면 된다고 한다. 지금 대학에서야 같이 배우지 못한 학생들이 영어 원강을 하니까 얼마나 답답하겠나. 또 평생 영어와 담쌓은 원로 교수들은 어떠할까. 지금은 고생하지만 10년 뒤에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질 수 있다. 한 서울대 영문학과 교수가 한 말이 있다. 수업에 원어민 수준의 학생이 들어와서 강의를 듣다가 빙그레 웃었단다. 영어와 평생 담쌓고 살 수 있다면 좋다. 하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과감하게 할 필요가 있다.

이 = 영어를 필요로 하는 시대에 바이링규얼 하는 게 필요하겠지만 과연 모든 학생이 그렇게 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유럽의 경우에도 태생적인 환경 탓에 몇 개 국어를 하지만 발음이나 소통에서 문제를 겪기도 한다. 우리처럼 생활이 모국어 위주로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힘들지 않을까.


다시 대학의 문제로 돌아가서 우리나라 고등교육 정책이 나아갈 방향을 짚어보고 마무리를 했으면 한다.


복 = 대학 입시와 관련된 문제가 자주 나오는데 대학에서는 자기들이 유리한데까지만 논의할 뿐이다. 지금 정부는 시시콜콜 대학 정책에 간여하고 있는데 대학에서는 정부에서 통제해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부분은 그대로 나두고 학생 선발권만 달라고 하고 있다. 자유주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대학에서 권리 찾기에 급급한 논의에 몰두하고 있지만 사실 소비자에게 선택권을 줘야 한다는 방향으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 본질을 건드리지 않는 한 성형수술에 불과하다.


‘백년지대계’ 교육 철학 절실


이 = 교육은 정권교체와 무관하게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하는데 매 정권마다 요동을 치니 일관성 없는 정책이 교육 수요자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다른 부분은 몰라도 적어도 교육문제는 입으로만 ‘백년지대계’를 주장하지 말고 학문적으로 지속적인 아젠다가 관철돼야 한다. 그게 안 되니까 문제가 발생하는 게 아닌가. 무리하게 외국식 대학 모델을 한국사회에 적용하거나 업적지상주의로 교수들을 내모는 것 등등 성급한 업적주의에 물든 교육정책에 대해 대학은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지 고민해야 할 것 같다. 정권의 선택과 집중 전략도 문제점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선심성 교육정책은 없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복 = 정권 교체 때마다 교육정책이 바뀌었다고 하는데 사실 밖에서 볼 때는 하나도 안 바뀌었다. 입시 제도도 아직까지 정부 주도이며 기술적인 사소한 부분들만 변화가 있을 뿐이다. 교육 정책은 기본적으로 누구에게 교육을 시킬 것이냐를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교육의 의미는 못하는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다. 지금은 잘하는 사람만 골라서 교육을 시키고  거꾸로 공부를 못하면 교육기회를 박탈한다. 왜 이런 시스템이 나왔는지 돌아보고 근본적으로 뜯어 고쳐야 한다. 돈 없고 재능이 없는 학생들도 가서 배울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못하는 학생일수록 좋은 기관으로 가서 잘 가르쳐야 민주사회 시민을 만들 수 있다. 이런 문제를 인식하는 대통령 후보가 나오면 좋겠지만 희망적이지는 않다. 그 전에 우리 사회 지식인 집단이 나서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하다. 사회 양극화 측면에서 가장 큰 게 교육이다. 대학이 프리미엄만 누리려고 하지 말고 이 문제를 반성하고 고민해야 한다.


이 = 많은 부분에 공감한다. 처방과 해법만 좀 다른 것 같다.

복 = 제가 서울대 민영화를 20년 전에 주장했다. 민영화 안되면 서울대는 폐지될 거라고 말했다. 부모는 가난해서 못 배웠지만 자식은 원하는 곳으로 보낼 수 있어야 하는 교육정책이 펼쳐져야 한다.


<사진= 한명섭 기자, 정리= 부미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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