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 마리아, 가지 마세요! 나 마구간 가라구 안 그럴게요. 우리 집엔 바(방)이 있어요. 고짓말 아네요.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내, 내가 연극 +망쳐놨어요. 그치만 어떻게 고짓말을 할 수가 있겠어요. 우, 우리 집엔 빈 바이 있거들랑요. 그, 그건 하나님도 아시잖아요."

18년째, 12월이면 어김없이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관객을 찾아오는 연극 『빈 방 있습니까』. '손수건 필수'라는 홍보 문구는 정작 이 작품의 전단에 쓰여야 할 것이다. 지진아 덕구를 지켜보다 눈물을 흠씬 뺀 관객들은 성찰이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기 마련. 그리고 또다시 12월이면 관객들은 끌리듯 상업성과 흥행성을 두루 갖춘 여타 작품을 제쳐두고 이 작품을 찾는다.

81년부터 이 선물을 준배해온 산타는 연극연출가이자 화가인 +최종률씨(한동대 강사·연극)이다.

"어린 시절부터 끼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친구들을 모아놓고 혼자 +작·연출·주연을 맡아 쇼를 벌이곤 했으니까요. 대학에서도 전공인 미술보다는 연극반 활동에 더 열심이어서 선생님들로부터 꽤 많은 꾸중을 들어야 했지요."

서울대 미대 66학번인 최씨는 전업연극인이 아니다. 하지만 항상 연극을 옆에 끼고 살아왔다.

대학시절엔 연극동아리 「상설무대」에서 활동하며 대학극에 미쳐 지냈다. 이 시절의 지우가 김지하, 김민기씨 등이다. 이들과 함께 창작극 운동을 펼치던 중 제작한 작품이 『금관의 예수』. 이 작품으로 불법 순회공연을 강행했고, 이에 대한 답례로 돌아온 것이 중앙정보부 연행이었다. 덕분에 남산 대공분실도 구경했고,「상설무대」는 조각이 났다. 이후 +「맥토」라는 극단을 창단했다. 지금 「상설무대」의 적자는 연우무대로 꼽히지만 당시엔 「맥토」에서의 활동은 그리 길지 않았다. 80년에 선교극단 「증언」을 창단했으니까.

대학을 떠나와선 여고의 미술 교사가 되었다. 20여 년의 교편 생활 동안에도 연극활동은 계속되었다. 여고생들의 연극반과 미술반을 지도했고, 교사들의 연극 작품을 올리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최씨는 '배우더스틴 호프만을 닮은 미술 선생님'으로 통했다. 그 시절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가르치는 일이 적성에도 맞았다. 돌이켜 생각해도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다.

강박신경증. 91년, 그 좋아하던 교직에서 떠나온 것은 지병 때문이었다. 10여 년 이상 앓아온 강박신경증은 생각이 찐득찐득 달라붙는 병이다. '하나님은 동그란 세모를 작도하실 수 있으실까'라는 것처럼, 해답을 구할 수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다. 고민하다가 나무토막처럼 +쓰러지고, 30분쯤 후에 깨어나 다시 생각에 빠졌다. 병세는 좀처럼 나아지지않았고, 몸은 약에 취해갔다. 폐인의 지경이었다.

교사 생활을 중단하고 약을 끊었다. 놀랍게도, 1년만에 완쾌되었다. 한동대와 장로신학대에서 연극을 강의한 것은 올해 들어서이다. 가르치는 일은 여전히 즐거운 작업이다.

대학졸업반 때 접어든 '예수쟁이'의 길에서 작품활동을 하다보니 신앙 +소재 연극의 전문연출가가 되어 있었다. 연출 요청이 들어오는 것도 +종교와 관련된 것들이다. 혼자서 극작, 연출, 무대미술, 분장, 음악까지 책임질 수 있는 몇 안되는 연출가이지만 젊은층에 밀리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럴 즈음, 오페라 『밤에 찾아 온 손님』의 연출을 +맡았다. 내년 초 공연될 뮤지컬 『그』의 연출도 최 씨의 몫이다.

틈새 활동에 열중하는 동안 개인전 한 번 열어보지 못했다. 연출가, +배우에게 주는 어여한 상을 받아본 적도 없다. 하지만 아직 그에겐 많은 +꿈이 있다. 그랜드 오페라도 연출하고 싶고, 멀지 않은 시간내에 개인전도 개최해야 한다. 세상에서 무서운 사람은 '꿈을 가진 이'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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