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조명]故 김연준 박사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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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구국 위해 교육사업에 투신

7일 새벽 작고한 고 김연준 한양대 전 이사장은 일생 동안 음악가이자 교육가로서 또한 신문인과 인권운동가로서 열정적인 삶을 살아왔다. 우리 교육계와 음악계에 이름을 남긴 김연준 박사의 삶을 돌아본다.

▲국내 최초 민립 공과대학 탄생

1914년 함경북도 명천군 상우남면에서 아버지 김병완, 어머니 김성녀 사이에서 삼형제중 막내로 태어난 김연준은 우북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고등 보통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동기생들과 달리 1년 늦게 졸업, 경성고보 9회 졸업생이 되었다. 졸업을 앞두고 일본인 교무주임이 물건이 없어졌다고 조회 때 학생들 호주머니 검사를 하는데 대해 도둑놈 취급말라고 항변하다 무기정학처분을 받은 탓이었다.


졸업 후 연희전문에 진학한 뒤 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중 교육사업에 뛰어들기를 결심했다. 조국 독립의 원동력이 되는 민족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교육사업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특히 공업기술을 가리치는 학교가 중요하다고 보고 연희전문을 졸업하던 해인 1939년 7월 1일 동아공과학원의 설립인가를 얻었다.


2년제의 토목과, 광산과, 건축과를 설치하고 그 이듬해 전기과를 신설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강제징병, 수업단축령 등으로 학원운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종래 학업성적 본위의 입시 제도는 체력을 중시하는 제도로 바꾸었고 일본 군인을 배속장교로 배정받아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창씨개병 발표 등 강압이 계속되면서 끝낸 1944년 9월 15일 마지막 졸업생을 배출하게 된다.


그러나 김연준은 해방과 함께 교명을 건국기술학교로 바꾸고 다시 한번 교육사업에 열정을 쏟았다. 건국기술학교를 정식대학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1946년 5월 재단법인 한양학원을 설립, 야간의 전문학교 과정인 건국기술학교와 주간의 중등과정인 한양공업학교를 탄생시켰다. 1946년 8월에는 전문학교 공인에 의한 건국기술전문학교로 바꾸었고 1947년 한양야간 공업대학관으로 승격됐으며 1948년 7월 한양공과대학으로 정식인가를 얻으면서 국내 최초의 민립 공과대학이 탄생했다.

하지만 대학이 정상궤도에 접어들고 있을 무렵 6.25동란이 터졌고 결국 부산 완월동 산기슭에 가교사를 짓고 수업을 했다.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서울시로부터 행당산을 교지로 불하받아 지금의 한양대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나는 돈이 생기면 한 푼이라도 재단에 넣었다. 나의 머리 속에는 오직 학교밖에 없기 때문에 땅 한 평을 사더라도 재단 명의로 해 두었다. 나의 이상은 될 수만 있다면 전교생을 기숙사에 수용하고 장학금을 주어서 그들이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자서전에서)

▲음악에의 사랑

음악가로서 김연준의 삶도 열정적이었다.

그는 연희전문 재학 시절 당시 음악과는 없어지만 교양과목 음악과장직을 맡고 있던 현제명 선생을 음악 지도교수로 만나 음악을 배웠다. 주로 성악을 배웠으며 바이올린, 작곡, 문학작품 등을 두루 접할 수 있었다.

음악가로서의 그의 꿈은 1970년에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한동안 교육사업에 매진해왔던 그는 1971년 9월 1백곡 작곡집을 발표하고 72년 10월 1백곡 작곡 발표회를 가졌다.

김연준 박사는 당시 "악상이 마치 분수처럼 떠올랏다. 오선지가 없으면 흰 종이에다가 아라비아 숫자를 약식 음표삼아 샘솟는 음악적 영감을 받아적었다"라고 전했다.

그의 가곡 '시인의 죽음', '비가' 같은 곡은 당시 한국 작곡가들이 잘 쓰지 않던 마이너단조를 부정적인 느낌이 아닌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느낌으로 승화시켜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가곡 '청산에 살리라'는 온갖 물질적인 것, 세속적인 것, 권위, 욕망 등 세상의 모든 먼지를 다 털어버리고 싶다는 예술가로서의 그의 욕망을 담았다.

그는 1974년 일본 NHK의 초청을 받아 처음으로 세계무대에 그의 음악을 알렸다. 이 때 벌써 600곡을 출판하고 난 뒤었기에 일본 음악인들에게는 놀라움의 대상이 됐다.

이후 세계 각국에 그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1979년에는 독일 보쿰대학 초청으로 7개 도시에서 한국 음악의 밤 연주회를 가졌고 튀빙겐대학에서는 500주년 기념 예술가상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1981년에는 미국 카네기홀에서 당당히 작곡 연주회를 갖는다. 그는 자서전에서 "작곡에 열중한 지 20년쯤 되었을 무렵, 300여곡 가량 작곡을 했고 거의 매일 한 두곡씩 쓸 정도의 악상이 용솟음 쳤다"고 밝혔다.

▲신문사업에 도전하다

그가 새롭게 도전한 분야는 신문사였다. '사랑의 실천'이라는 한양학원의 교훈을 널리 알려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 결론이었다. 1960년 경영의 어려움을 겪던 평화신문을 인수하고 61년 대한일보로 제호를 바꾸고 재 창간하는 형식으로 창간호를 발행했다.

사시를 한양대 교훈인 사랑의 실천으로 바꾸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사설을 강화하여 특성화하자고 이른바 '도의사설'을 게재했다. 김연준 박사는 윤리와 도덕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윤리회복이 급선무라고 보고 도의사설을 1주일에 두번 이상씩 게재하도록 했다.

그러나 대한일보는 1973년 중대한 위기를 맞는다. 정가의 회오리 속에 수재의연금과 관련 업무상 횡령 및 알선 뇌물공여 혐의로 구속 기소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폐간이 되면 사건이 무마되는 것으로 판단한 직원들은 1973년 5월 15일 대한일보를 자진폐간 형식으로 문을 닫았다.

나중에 무혐의 처분을 받고 청와대의 부름을 받고 간 김연준은 대통령으로부터 "신문사야 기회가 닿으면 또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공과대학을 더 크게 해서 국가사업에 이바지 해 달라"는 얘기를 듣는다. 그는 이를 안산에 한양대 제2캠퍼스를 세운 인연으로 훗날 회고한다.

김연준은 대한일보 폐간의 슬픔을 '기독교 신문'으로 달랬다. 1965년 12월 발행한 기독교 신문은 도덕 재무장운동을 펼쳐 우리 민족이 세계를 지도할 수 있는 우수한 민족이 되도록 하려는 목적을 하고 있다.

김연준의 이같은 정신은 인권운동으로 이어졌다. 1953년 창립된 국제 인권 옹호 한국연맹의 회장으로 취임해 41년동안  자리를 지켰다. 국제인권옹호 한국연맹은 인권사상의 앙양, 인권제도의 개선, 인권침해의 구제, 북한인권의 개선이라는 목표로 창립됐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온갖 갈등과 분쟁들을 화해시키고 병든 인류를 구해낼 유일한 덕목이 '사랑의 실천'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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