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범 100일 정부, 관치 유혹 못벗어나 대학 자율화 정책 실종

이명박 정부 출범 100일을 맞은 청와대와 교육과학기술부의 표정이 침울하다. 이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는 17.2%(지난 2일 KBS 여론조사)까지 떨어졌다. 영어공교육, 4·15 학교 자율화 방안 등 제대로 된 의견수렴 없이 추진된 급속한 정책 변화는 교육 현장의 반발에 부딪혔고, 학생들은 교과서 대신 촛불을 들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 중 발생한 교과부 간부들의 ‘모교·자녀 학교 지원 논란’은 취임 100일(7일)도 안돼 김도연 장관을 퇴진으로 몰아붙였다. 정책 결정 시스템과 추진 방식을 재정비하지 않고서는 총체적 난맥상을 벗어나기 어려워 보인다.

□ 대학 자율화 하는 것 맞나?= 지난 100일 동안 교육 분야는 가장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대입 3단계 자율화, 학사운영 자율화로 대표되는 대학 자율화 조치는 지난 10년간 유지돼 온 정책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그러나 한껏 기대에 부풀었던 대학가는 ‘위에서 주어지는 자율화’ 과정을 지켜보면서 정부의 대학 자율화 의지에 조금씩 의구심을 품고 있다. 입으로는 대학 자율화를 말하지만 정책 추진 과정을 보면 아직 ‘관치주의’의 유혹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국입학처장협의회는 지난 1월 21일 기자회견을 열어 “6개 지역협의회 의견을 수렴해, 수능 등급제를 보완하되 그 시기는 2010학년도 이후로 해 줄 것을 한국대학교육협의회(이하 대교협)에 요청했다”고 밝혔다. 바로 다음날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대입 3단계 자율화 방안을 발표하면서 수능 등급제 폐지 시기를 2009학년도로 앞당겼다. 입학처장협의회 발표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정부가 해오던 ‘대학입학전형 기본계획’ 수립을 대교협으로 넘기면서 고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안에 발표 시기를 학년 개시일 1년 9개월 전으로 못 박은 데서도 비슷한 지적이 제기된다. 황영기 전국기획처장협의회장(경남대)은 “아무리 대학입시가 핫이슈라 해도 자율화하겠다고 했으면 그런 세부적인 결정은 대교협에 넘겨야 한다”며 “그런 세세한 내용까지 정부가 발표할 정도라면 입시업무를 넘긴다는 말을 믿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최근에는 대교협 사무총장 사표 수리를 둘러싸고 인사 개입 의혹이 불거졌다. 대선 때 이 대통령을 도운 B모 교수를 사무총장에 앉히기 위해 김영식 전 사무총장에게 사퇴를 압박했다는 의혹이다. 입시 업무를 대교협으로 이양하겠다고 밝힌 마당에 전국 198개 4년제 대학 총장들의 자율 협의체인 대교협 사무총장 인사에 관여한다는 소문이 나도는 것 자체가 자율화의 취지를 퇴색시킨다는 지적이다.

□ 소통 없는 일방적 정책 추진= 의견수렴 과정 없이 일방적으로 정책을 밀어붙인다는 비판은 고등교육 분야에서도 여지없이 제기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학정보공시제와 관련된 ‘해프닝’이다.

교과부는 지난 4월초, 기존 51개 항목 외에 교원급여·중도탈락률 등 6개 항목을 대학정보공시항목에 추가하기 위해 의견을 수렴한다는 공문을 전국 대학에 보냈다. 하지만 그 다음날 다시 의견수렴을 취소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발송했다. 한 대학 관계자는 “의견수렴을 안 한다고 하기에 당연히 항목 추가를 취소하는 줄 알았더니 며칠 뒤(4월 28일) 6개 항목을 추가해서 ‘대학정보공시제 시행안내’라는 공문이 왔다”고 말했다.

법률 제·개정 작업에서도 의견수렴 절차를 생략하려는 ‘과감한’ 의도가 엿보인다. 교과부는 5월 28일 ‘국립대 재정·회계법’ 제정을 위한 시안을 발표했는데, 대학가에서는 정부가 ‘꼼수’를 부리다 어쩔 수 없이 정부입법을 선택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사정을 보면 이렇다.

정부와 한나라당은 17대 마지막 국회인 지난 4월 임시국회에서 ‘국립대 재정운영 특별법’ 처리를 시도했다. 2005년 5월 당시 이주호 의원(현 청와대 교육과학문화수석)이 발의했던 법안이다. 그런데 정부가 5월 2일 교육위원들에게 배포한 자료를 보면, 이 법안을 수정하는 형식으로 사실상 국립대 재정·회계법 제정을 시도했다.

국립대 재정운영법의 이름을 ‘국립대 재정·회계법’으로 바꾸고, 재정위원회는 ‘대학의 장, 교직원·동창회·학생 대표 등으로 구성한다’는 조항에서 ‘대표’를 삭제했다. 발전기금 설치 등 주요 내용이 지난 5월 28일 공개한 시안과 동일하다.

이에 앞서 정부는 대학입시 업무 이양을 위해 대교협 및 전문대협의회법 개정안을 4월 16일 입법예고했다가 똑같은 내용의 개정안을 4월 25일 의원입법 형태(한나라당 임해규 의원 대표발의)로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한정이 대학노조 정책국장은 “법 제정 시 거쳐야 하는 의견 수렴 등의 입법절차를 줄이기 위해 상대적으로 쉬운 의원입법 형태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며 “한나라당이 국회를 장악한 18대 국회에서는 주요 정책 추진을 위한 법률 제·개정을 의원입법 형태로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 교과부는 없고 청와대만 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가장 많이 쏟아진 지적은 ‘청와대의 정책 독점’이다. 새 정부가 출범한 직후이기 때문에 대통령 공약사항과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청와대 입김이 너무 강하게 작용하면서 막상 교과부는 단순 실무기구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비판의 중심에는 이주호 청와대 교육과학문화수석비서관이 있다. 서울대 공대 학장 출신 김도연 장관이 취임할 때부터 ‘교육-이 수석, 과학-김 장관’ 중심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이 수석은 “교육은 내가 챙기겠다”며 주요 정책 대부분을 ‘상명하달’식으로 교과부에 전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호봉 전국시도교육위원회 의장은 공개적으로 “이 수석이 장관 위에 군림하고 장관은 눈치를 보느라 아무 역할도 못하고 있다. 교육개혁은 한 두 사람 머리에서 나와 급속히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고 성토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이 수석이 정책을 좌지우지하고 있는데다 ‘공무원 정원 감축’ 때문에 교과부 내에서는 쉽게 이의 제기조차 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청와대 독주는 두 부처 통합에 따른 혼란과 맞물리면서 결국 내부 시스템 부재를 낳았고, 교과부 장관 퇴진론으로 확산된 ‘모교·자녀 학교 지원 논란’으로 이어졌다.

한 국장급 직원은 “이제야 겨우 시스템을 갖춰 나가는 상태”라며 “예전 교육부 같았으면 누군가 문제 제기를 했을 법도 한데, 실·국장 회의에서 누구 하나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다.

김동석 한국교총 대변인은 “국민여론과 학교현장의 의견 수렴 없이 불쑥 대던져진 교육정책으로 국민적 우려와 학교 현장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며 “청와대가 아니라 교육과학기술부가 중심이 되어 현장여론을 충분히 수렴해 단계적이고 신중하게 교육정책을 추진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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