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콘텐츠가 바뀌어야 한다”

최근 서울지역 유명 A대학의 한 학부에서는 3개 교과목을 똑같이 가르치는 일이 발생했다. 교수 위주로 커리큘럼을 짜다 보니 생긴 해프닝이다. 각종 대외 평가에서 논문 잘 쓰는 교수가 각광받으면서 대학들은 앞 다퉈 논문 편수가 많은 교수들을 채용하고, 연구업적 위주로 평가하다 보니, 어떤 학과는 같은 분야의 교수가 3분의 1을 차지하기도 한다.

대형 강의실에 100~200명의 학생을 채워 놓고 가르쳐서는 경쟁력이 없을 뿐더러 변화된 콘텐츠를 따라갈 수 없다. 교육의 질을 평가하고, 지속적인 품질 관리가 필요한 이유다.

교육의 품질을 보장하는 학문 분야별 인증이 확대되고 있다. ‘000 인증 획득’이라는 홍보 문구를 쉽게 접할 수 있을 정도로 인증 준비 대학이 늘고 있는 가운데, 내년부터 각 대학이 평가·인증 결과를 교육 수요자에게 공개하도록 바뀜에 따라, 인증에 쏠리는 관심이 커지고 있다.


민간 기구에서 학문 분야별 인증기관은 현재 8곳으로, 이들은 대학의 신청을 받아 기관이나 교육 프로그램을 평가·인증하고 있다. <표 참조>

인증기관 가운데 가장 먼저 설립된 한국공학교육인증원(이하 공인원)은 2001년 2개 대학 11개 프로그램의 인증을 시작한 이래 지난해까지 37개 대학 295개 프로그램(공학 286개, 컴퓨터·정보기술 9개)을 인증했다.

공인원은 올해 신규로 30개 대학 207개 프로그램, 중간평가는 21개 대학 127개 프로그램 등 총 41개 대학 304개 프로그램에 대한 평가를 진행 중이다. 내년에는 36개 대학 256개 프로그램이 예정돼 있는데, 이 중 신규는 16개 대학 88개 프로그램으로 예년에 비해 신청이 크게 줄었다. 인증받을 만한 공과대학 상당수가 인증을 받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단기간에 공학 인증이 확대된 데는 삼성전자와 LG노텔 등이 프로그램 이수자를 우대하고, 국제 인증인 ‘워싱턴 어코드’ 정회원에 가입한 게 한몫 차지했다. 공인원은 현재 컴퓨터·정보기술 분야의 국제적 상호인증 협약체인 ‘서울 어코드’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전문대학 공학기술교육 인증을 준비 중인 공인원은 예비 인증 기준을 오는 12월 말 발표할 예정이다. 추진위원회 산하 실무위원회에 따르면, 다음 달 중순까지 미국·아일랜드·남아공 등 3개국을 실무위원들이 방문, 현지 인증 프로그램 심사과정을 견학한다. 아울러 호주와 뉴질랜드의 주요 전문대학 교과과정을 분석 중으로, 실무위원회는 인정기준, 자체평가서 작성법, 규정 절차 등을 마련해 10월 중순 공청회를 열 계획이다.

2009년 예비 인증은 내년 5월까지 인증 희망 대학 신청을 받으며, 7월까지 자체평가 보고서를 제출받아 9월 2~3개 분야 2~3개 대학에 프로그램 시범 인증을 실시하게 된다. 정규 인정은 2010년부터 시작된다.

인문사회 분야에서 올해 첫 인증 결과를 발표하는 한국경영교육인증원(이하 경인원)은 연세대·서강대·한양대 등 5개 대학의 실사를 마쳤으며, 다음 달부터 10개 대학 실사에 들어간다. 지난해 신청 대학 26곳 가운데 자체평가서를 제출한 15개 대학이 올해 실사를 받는 것이다.

경인원은 당초 실사를 마친 5개 대학은 이달 중 인증 결과를 발표할 계획이었으나, 10개 대학의 실사가 12월 중에 완료되는 점을 감안해 함께 발표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입시를 앞두고 자칫 5개 대학이 인증 프리미엄을 받게 되면, 후발 대학들이 불리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했다는 후문이다.  

국제 인증을 받는 대학도 늘어나 서울대·고려대·세종대·KAIST 등 4개 대학이 미국경영대학협의회(AACSB)의 인증을 받았으며, 연세대·서강대·한양대 등 10개 대학이 인증 절차를 밝고 있다. 고려대는 유럽교육인증(EQUIS)도 받았다.  

5년제 건축학과의 인증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한국건축학교육인증원(이하 건인원)은 전국 80여개 건축대학(건축전문대학원 포함) 가운데 강원대·명지대·서울대·울산대·한양대 등 모두 11개 대학의 인증을 마쳤다. 전·후반기에 걸쳐 인증 실사를 하고 있는 건인원은 후반기에 건국대 건축대학원과 경북대 등 2개 대학을 실사하며, 내년 봄에는 동아대·경기대·성균관대·연세대·충주대·호서대·한양대(안산) 등 7개 대학이 예정돼 있다. 건인원은 지난 4월 국제 건축교육인증 협의체인 ‘캔버라 어코드’ 정회원국에 조건부로 가입한 상태다. 

의과대 인정평가 사업을 시행하고 있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이하 의평원)은 9월 8일 편지방문평가단 워크숍을 갖고 제2주기(2007~2010년) 2차년도 인정평가 작업에 본격 돌입했다. 의평원은 올해 인정평가 대상인 경희대·아주대·연세대·영남대 등 4개 대학으로부터 자체평가보고서를 받았으며, 서면평가와 현지방문평가를 실시해 오는 12월 최종 결과를 발표한다. 지난해 실시된 1차년도 평가에서는 고려대·서울대·성균관대·울산대·인하대 등 5개 대학이 모두 5년 인정을 받았다. 총 41개 의과대학을 대상으로 실시된 제1주기 인정평가에서는 32개 대학이 완전인정, 9개 대학은 조건부 인정을 받은 바 있다.

간호학의 경우 지난 2004년 첫 인정평가를 시행한 한국간호평가원(이하 간평원)이 올해 경북대·한림대 등 4년제 2개 대학과 삼육보건대학·신흥대학·영남이공대학·서강정보대학·목포과학대학·혜전대학 등 3년제 전문대학 6곳 등 총 8개교에 대해 인증평가를 진행 중이다. 이들 대학은 자체평가보고서 서면평가와 방문평가를 거쳐 12월 말 평가 결과가 발표된다. 

무역학 인증도 준비 중이다. 지난해 11월 출범한 한국무역교육인증원(이하 무역인증원)은 무역관련 대학 학부(과)장을 초청해 공청회를 연 데 이어 무역교육인증편람을 개발 중이다. 무역학은 두 단계에 걸쳐 평가하는데, 1단계는 무역학 전체를 인증하고 2단계는 무역학교육 프로그램을 인증하게 된다. 인증 평가란에는 무역학 교육의 목표와 성격, 학문적 연구범위가 반영되는데, 무역인증원 측은 타 학문분야와 중복되는 교과내용을 무역학부(과) 또는 전공과정에서 교육하는 경우도 타 인증원의 기준과 상관없이 무역학 인증기준으로 평가된다고 밝혔다.

■ 인증 실효성 싸고 논란도


이처럼 학문 분야별 인증이 늘고 있지만, 인증을 둘러싼 논란도 여전하다. 대학들이 경쟁적으로 인증을 받으면서 실효성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것. 교육 품질 개선보다는 인증에 필요한 보고서 작성에 치이고, 수강인원 제한으로 정작 듣고 싶은 과목을 수강하지 못하거나, 부랴부랴 과목을 개설하는 등 ‘보여주기식 인증’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평가 인력 풀은 한정돼 있는데 신청 대학이 급격히 늘면서 평가의 객관성 논란도 단골 메뉴로 등장하고 있다. 윤우영 공인원 정책기획위원장(고려대 교수)은 “질을 평가하는 피어 리뷰(Peer Review: 동료 평가)는 평가가 어렵고,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며 “결과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러 단계를 거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조율’이 필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칫 인증 기구가 또 다른 규제를 만드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교육의 질을 개선하고 유지하는 최소한의 인증 기준을 제시해야지 관리와 통제로 흘러서는 취지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소규모 학과의 경우 교수 확보율과 교과목 개설 비율 등을 맞추지 못해 인증 자체를 아예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손태원 경인원 수석부원장(한양대 교수)은 “교수가 10명 미만인 학과는 1명이 4~5개 과목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품질 유지가 안 된다”며 “지역별 컨소시엄을 구성해 신청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가령 지역 내 3개 대학의 학과를 묶어 교과목을 개설, 학점교환제 형태로 운영하는 방식이다.

대학 입장에서는 당장 인증 심사 및 유지 비용도 큰 부담이다. 인증기관 한 관계자는 “협력단체가 많은 인증기구는 사업비를 지원받아 실비로 심사를 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곳은 평가비용의 대부분을 대학에서 충당하게 된다”며 “정부의 재정적 지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결국 학생들이 부담을 떠안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인증 프로그램 이수자에 대한 실수요자인 기업체의 우대가 미약한 현실에서 외국의 틀에 매달릴 게 아니라, 우리 현실에 맞는 기준 설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신황호 무역인증원 초대 원장은 이에 대해 “자칫 한국형을 고집하다 보면 한국에만 적용돼 인증 자체가 제한적일 수 있다”며 “국가 간·다자 간 협약 시대에 세계적 공인성을 가진 인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해외로 나갈 수 있는 길을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통로를 마련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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