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증은 바람직한 교육 평가제도

'인증'이라는 단어가 한국 대학 사회에 퍼지기 시작하고 있다. 공대 교수와 공학인들은 지난 3년간 철저한 준비 작업을 걸쳐 작년에 공학교육인증원을 발족하고 올해 시범인증을 실시한다. 의학계도 비슷한 시기에 의학교육인증원을 설립했다. 인증제도는 곧 전문인력을 배출하는 다른 학계로도 확산될 것이다.

인증이란 교육의 품질을 평가해서 최저기준을 만족시키는 대학과 그렇지 못한 대학을 가려내는 제도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짤막한 설명을 들으면 교수들은 기운이 쑥 빠지기 쉽다. 최근에 대학평가, 강의평가, 교수업적평가 등 잡무와 위장병만 잔뜩 증가시키는 듯한 온갖 평 가가 무더기로 도입되는 바람에 평가라는 말만 들어도 입맛이 쓰지 않는가. 그런데 이제 또 하나의 평가가 인증이라는 가면을 쓰고 추가되는 것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증제도를 자세히 알고 보면 인증은 여태껏 한국에서 실시해오던 평가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혁신적이고 새 시대에 걸맞는 제도라고 인정하게 될 것이다.

새 시대의 교육 개혁 방향은 세 단어로 압축할 수 있다. 다양화, 특성화, 그리고 자율화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개념은 교육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 개념들은 지식기반사회의 기 본 패러다임이기 때문에 사회의 모든 면에 적용된다. 따라서 평가제도에도 적용되어야 평가 가 군소리 없이 진행되고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아직은 우리에게 생소한 인증제도를 이 세-자율화, 다양화, 특성화-개념에 비 추어 설명하고자 한다.

평가받는 건 대학 자율

새 시대에는 교육기관이 '스스로 알아서' 교육 목적을 다양하게 세우고 교과과정을 특성 있 게 운영할 수 있지만, 그 대신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 그래서 자율화가 기본인 새 시 대에 평가는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제도다.

그러나 평가를 하고자 할 때 다음 두 질문은 반드시 해야한다. 평가는 누가 하는 게 바람직 할까? 그리고 평가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누가(who)' 평가를 '왜(for what)' 하는가에 따라 평가가 발전을 도모하기도 하고 말썽만 잔뜩 빚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단순하다. 수직적 구조를 지닌 구시대에는 권위자가 대학간 서열을 매 기기 위해 평가를 일방적으로 단행해도 어찌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수평적 구조를 지닌 새 시대의 평가는 등급을 매기기 위한 심사가 아니고 발전을 위한 피드백 도구가 되어야 하며 자율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시대가 정보화 시대인 만큼 평가 결과가 사회에 공개되어야 하며, 공개된 정보를 사회가 어떻게 쓸 것인가 또한 각 사회 기관의 자율에 맡겨야한다.

인증제도를 백 년 가까이 실시해 온 미국의 예를 들어보자. 인증은 독립된 기관에서 주도하며, 대학은 인증평가를 받아야 할 의무가 없다. 인증 받기를 원하는 대학만 평가를 하며, 최 소한 기준을 달성했는가 못했는가만 차별화할 뿐 수준을 점수로 계산하지 않는다. 이런 규 정은 인증으로 인하여 발생할 수 있는 대학/학과 서열화를 적극적으로 방지하기 위해서다.

평가 결과, 즉 인증 여부는 공개적으로 알리게 되어있으며 정부, 기업, 학생들이 참고한다. 정부는 인증 받은 대학에 등록하는 학생들에게만 정부 장학금을 주는 정책을 세우고 있으며, 기업은 신입사원을 뽑을 때에 나름대로 어느 대학, 어느 학과의 인증 여부를 얼마큼 중요하게 고려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결국 장학금과 취업에 민감한 학생들은 인증 받 은 대학/학과를 선호하게 된다.

이렇듯 미국에서는 인증평가를 받고 안 받고는 대학의 자율이지만, 타 기관에서 인증결과에 부여하는 가치 때문에 대부분의 대학들이 인증을 받으려고 스스로 노력한다. 중요한 점은 인증을 받기 위해 교수와 교직원들이 비록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만 인증 절차를 불필요한 관료적 문서 작업이라고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교육자들이 스스로가 교육을 발전시키기 위 해 인증이라는 절차를 자발적으로 개발하였고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자율화란 이토록 중요하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자신이 원해서 할 때는 남이 시켜서 억지로 할 때보다 몇 십 배 더 많이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긍정적인 제도로 인하여 미국 교육 은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고 새로운 사회적 요구에 맞추기 위해 꾸준히 발전해 온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처음으로 시도하려는 공학계와 의학계의 인증제도는 자율적 평가 제도다. 벌 써 긍정적인 반응이 보인다. 아무 대학도 인증 평가를 강요받지 않지만 오히려 서로 먼저 평가를 받겠다고 '경쟁'하는 기현상까지 나오고 있다. 이것이 자율화의 위력이다. 한국에서 실시하는 인증평가는 교육개혁에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어 줄 것이라고 믿는다.

최종 목적은 '특성화' 존중

미국 대학 인증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대학을 전체적으로 인증하는 대학 단위별 인증 이고, 다른 하나는 특정 학과나 프로그램에 대한 분야별 인증이다. 각 대학은 10년 주기로 인증평가를 받으며, 모든 학생들한테 적용되는 교양교육 교과과정을 주로 고려한다. 일반 교 과과정 이외에 학생 선발과 관리, 교수진, 직원, 연구, 정보 인프라, 보조 시설, 재정 등을 평가한다.

중요한 점은 대학 단위 인증을 관장하는 기관은 학문 분야별 인증을 관장하지 않는다는 것 이다. 학과별이나 교육 프로그램 단위를 평가하는 기관이 따로 있다. 그리고 모든 학과가 인증 받는 대상은 아니다. 대체로 문과, 이과는 분야별 인증 대상에서 제외되고 법대, 의대, 치 대, 간호대, 공대, 경영대 등 소위 전문직 학위(professional degree) 프로그램이 인증 대상이다. 분야별 단위는 대학 단위보다 짧은 주기로 인증평가를 받는다. 예를 들어, 공학 프로그 램은 6년 주기로 평가를 받는다.

이처럼 대학 단위 인증과 학과 단위 인증을 관장하는 기관이 서로 다르다는 이중구조의 장 점이 여럿 있다.

첫째, 대학 전체를 인증하는 기구가 또 전문적 학문 분야를 인증할 경우 독점에서 비롯되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인증기관의 이중구조는 어느 한 기관에 모든 권한이 집중되지 않도록 견제해주고 특정인(또는 집단)의 독점이 생기지 않도록 구조적으로 예방할 수 있게 해준다.

둘째, 전문적 학문 분야를 비전문인 단체가 평가할 경우 평가할 수 있는 항목은 학생 대 교 수 비율과 같은 정량적인 것 밖에 없다. 이럴 경우 평가 결과가 최종 점수 하나로 압축되기 마련이다. 그 점수가 무엇을 뜻하는지 내막을 알 수 없으니 따질 수도 없다. 결국 평가 점수 는 불가사의한 일이 되어 버리고 대학과 학과를 서열화시키는 데만 쓰이게 된다. 그러므로 평가에 대한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서 전문적 학문 분야는 전문인 단체가 평가해야 하는 것이다.

셋째, 특히 평가의 최종 목적이 '발전을 위한 피드백'이라면 그 일은 전문인들만이 할 수 있 다. 이미 미국에서는 대학을 방문하는 실사단을 평가자라고 하지 않고 평가-자문단이라고 한다. 인증은 평가와 자문이라는 두 가지 역할을 같은 비중으로 둔다는 뜻이다.

이런 인증기관의 이중구조는 새 시대가 요구하는 특성화란 개념을 잘 반영하는 예다. 특성 화란 분리 분담의 원칙이 존중되어야 가능하다. 분리 분담은 다시 독점 배제와 전문화로 연결된다. 한국에서 시도하는 대학/학과 평가도 전문성을 최대한으로 살릴 것으로 기대한다.

대학·학과별 다양화 유도

대학 단위 인증 기준은 다음과 같다. △대학에 설립 취지와 고등교육기관으로서 합당한 목표가 있는가 △그 목표를 달성하기에 필요한 인력, 재원, 자원을 대학이 충당할 수 있는가 △그 목표를 달성하고 있는가 △대학이 계속 발전할 수 있는가 △대학이 성실한 방법으로목표를 달성하는가 등이다.

교육 프로그램이나 학과 단위의 분야별 인증을 받기 위해서 학과(공학의 경우)는 다음 네 질문에 대한 자체평가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즉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목적 제시) △어 떻게 하고자 하는가(방법 제시) △목적을 달성하였는가(결과 제시)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가(피드백 제시) 등이다.

여기서 얻어야 하는 교훈은 인증이 교육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각 대 학/학과가 나름대로 특유의 목적을 세우기를 권하고 있다. 사실 많은 대학은 앞서가고 있는 대학을 모방하기 쉽다. 그러나 제각각 여건이 다르니 같은 목표를 세웠다하여 같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지 않은가. 오히려 생각 없이 동일한 목표를 세웠기 때문에 피해를 볼 수도 있다.

인증은 대학이나 학과가 각자 환경에 걸맞는 목표를 세우고 여건에 부합하는 방법을 택하기 를 요구한다. 그리고 스스로 평가해서 목표를 개선하거나, 더욱 효과적인 방법을 개발하거나, 아예 새로운 목표를 세우기를 권한다. 결국, 인증제도는 대학과 학과의 특성화와 다양화 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것이다.

한국공학한림원, 한국공학기술학회, 공학전문학회, 산업체가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공학교 육인증원은 교육의 다양화를 최대한으로 유도하는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공학교육인증 절차 자체가 한국 교육 개혁에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는다.

교육인이 적극 나서야 성공

한국은 시기적으로 인증 제도를 시작하려는 때가 바야흐로 한국이 지식 산업 사회로 들어가 는 초입이기 때문에 매우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미국처럼 인증제도를 산업 시대에 맞게 디 자인했다가 정보지식 사회에 맞춰 뜯어 고쳐야 하는 시행착오와 낭비, 갈등, 불만 등을 거치 지 않고도 아예 처음부터 지식기반시대에 걸맞게 디자인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서 정말 다행이다.

하지만 인증이 성공하자면 교육인 모두가 적극적이어야 한다. 또 하나의 평가가 나타나서 사람 괴롭힌다고 불평하거나, 이론상으로는 훌륭하지만 한국의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냉대 하지 말아야 한다. 인증이 한국의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발언은 개혁을 하지 않겠다는 소극 적 마음 자세를 고백하는 것이다. 개혁은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일이지 않은가.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