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 본지 논설위원·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지난달 20일 발생한 '용산 재개발지역 참사'는 한 달이 훌쩍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진행형’인 듯하다. 당일 06시 30분 특공대 진압작전 개시, 옥상조·지상조 투입. 06:47∼07:10 옥상 농성자와 망루 농성자 각 9명 검거. 07:19 4층 계단 부근의 농성자 중 일부가 망루외벽 해체 담당 특공대원들을 향해 시너 다량 투기. 07:20 망루 3층 계단 부근서 발화한 불로 인해 대규모 화재 발생. 07:52 옥상 농성자 9명 검거. 09:38∼12:50 농성자 5명과 경찰관 1명 사체 발견. 당시 상황을 시간대별로 기록한 일지를 보면 급박한 상황 전개가 실전을 방불케 한다.

용산참사의 발생 원인에서부터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자니 왠지 예전에 본 듯한 낡은 비디오를 다시 돌려보고 있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고개를 든다. 언젠가도 철거민 대책의 부조리로 인해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고, 격렬한 저항과정 중 인명 피해가 속출했으며,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희생양이 되어 옷을 벗어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럴 때마다 국회의원들은 당국을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며 재발 방지를 약속했었고, 사건 뒤엔 정권 실세의 말 못할 사연이 있을 것이란 음모론이 고개를 들곤 했었다.

결국 비슷한 유형의 사건 사고가 반복적으로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쉽게 망각하는 우리네 악습에 더해, 점점 더 극단적인 행동과 절박한 구호가 동원되면서 필요 이상의 사회적 갈등과 균열을 유발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자화상은 아닐런지.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현대사회를 일컬어 ‘위험사회’라 단정하고 있다. 물론 과거에도 위험이 상존하긴 했으나 현대의 위험은 본질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의 위험은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 즉각 감지할 수 있었기에 원인 규명이 가능했으며, 위험의 파생 효과는 위험 발생지역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현대사회의 위험은 점차 자신의 실체를 쉽게 드러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효과도 일파만파 확대돼 간다는 것이다.

더 더욱 주목할 만한 사실은 위험 속에 ‘성찰적 성격’이 강하게 내포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무엇이 위험인가, 얼마나 위험한가, 그 위험을 해결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나. 즉, 원인 규명에서부터 해결방안 모색에 이르기까지 전문가 집단의 지식과 정보 그리고 판단 능력이 매우 중요해지는 사회가 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굳이 울리히 벡의 분석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오늘의 한국사회는 전근대적 위험에서부터 성찰적 위험이 공존하는 ‘초(超)위험사회’임이 분명하다. 계절적으로 반복되는 재해 앞에서 동일한 유형의 인재를 반복하는 사회, 주기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파동 앞에서 분노하다 망각하고 마는 안전 불감증 사회, 사이버 공간을 타고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무절제하게 흘러 다니는 사회, 위험의 본질을 성찰함에 막중한 책무를 지고 있는 전문가 집단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 우리 사회가 다종다양의 위험에 얼마나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지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상황이 이러하기에 요즘 국민은 정부를 믿기가 주저된다. 위험의 반복성을 감지하는 마인드의 부재는 물론, 위험에 대처하는 방식에서도 예나 지금이나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덕분에 시위대측 주장과 경찰측 주장이 팽팽히 맞서는 가운데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가 진상규명에 근접하고 있는지 의문을 표명하는 목소리가 여전하고, 용산참사로 인한 촛불시위의 불씨가 완전히 삭아들지 않았음 또한 우려된다. 용산참사를 희석시키고자 강호순 사건을 터뜨렸으리란 음모론이 제법 설득력을 얻어 가고 있음도 걱정이고, 민생현안은 뒤로 한 채 용산참사를 놓고 연일 공방을 벌이고 있는 정치권의 모습도 실망만 더해 줄 뿐이다.

소 잃고도 외양간 못 고치는 우리네 고질적 습관이 이번만큼은 다시금 반복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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