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 소장

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 소장
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 소장

윤석열 정부의 신임 교육부장관으로 내정된 김인철 후보자의 첫 일성은 “정시 확대”였다. 지난 수년 간 교육정책의 무능과 무책임을 새 정부에서 바로잡을 줄로 기대했던 교육계에서는 우려가 매우 크다.

우선 현 수능의 “정시 확대” 방향은 김 후보자의 다른 발언들과 상충된다. 후보자는 “4차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갈 우리 학생들이 미래 핵심역량을 갖출 수 있게 하며, 디지털, 인공지능 등 미래 유망 분야를 선도하는 창의적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교육체제를 전면 전환하겠다”고 한다. 김 후보자가 수능 시험을 한번 풀어보면 좋겠다. 정해진 정답 맞히기로 변별하는 객관식 선다형 시험으로 4차산업혁명을 대비할 핵심역량을 기를 수 있는지, 디지털·인공지능 시대를 이끌 수 있는지, 창의적 인재 육성을 할 수 있는지, 직접 시험 문제를 풀어보고 확인해 보면 좋겠다. 현 수능 시험은 후보자의 추진 방향에 역행한다.

김 후보자는 또한 “소외되는 계층 없이 모두가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차별 없는 교육기회 제공을 통해 교육을 통한 상생과 동반성장, 공정과 평등의 가치를 구현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정시 확대는 이것에도 반한다. 공정성 명분으로 ‘정시 확대’를 추진하자 2022 대입에서 최상위권 대학에 강남 출신이 급증한 수치들이 계속 발표되고 있다. 정시가 기회의 공정처럼 보이나 사실상 결과의 공정이 전혀 아니라는 통계 결과들은 수년간 누적돼 왔다. 현 수능으로 정시 확대가 지속되면 지역 격차, 학교 서열화, 공교육 붕괴, 사교육 심화는 자명하다. 수시가 문제 없다는 것이 아니다. 수능이 문제 많아 학종이 도입됐는데 학종이 문제 있다고 다시 수능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원래 문제로 회귀일 뿐이다. 수시·정시 양쪽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는 건 해법이 아니다.

후보자는 대교협 회장을 지내면서 대선 후보들에게 “국가경쟁력에 부합하는 세계적 수준의 연구와 인재양성”을 요구했다. 그러한 대학의 신입생을 선발하는 수능이 과연 후보자가 말하는 국제경쟁력에 부합하는 세계적 인재양성과 같은 방향인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수능과 내신 둘 다 객관식 선다형으로 변별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그런데도 국가경쟁력에 부합하는 인재양성이 되겠는가?

김도연 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도 현 수능이 교육을 망쳤다며 정시 확대는 교육적이지도 않고 저소득층 자녀들에게 전혀 공정하지 않아 오히려 불평등이 세습될 뿐이라고 일갈했다. 수능의 창시자인 고려대 박도순 명예교수도 도입 취지가 왜곡되고 변질된 현 수능의 공정성은 허상이라며 예전의 학력고사만도 못하니 폐지하라고 비판했다. 교육전문가들의 이구동성은 현 수능이 교육적으로 타당하지도 공정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정시 확대 정책으로도 교육적 타당성과 공정성을 얻으려면 평가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다음 중 시대순에 알맞게 나열한 것은?” 혹은 “다음 중 적절한 것은?”과 같은 문제는 “전쟁이 사회 변화를 가속화한다는 관점에 얼마나 동의하는지 (2시간 동안) 쓰시오.” 같은 문제와 전혀 다른 능력을 측정한다. 어느 평가 패러다임이 인공지능 시대를 대비할 수 있겠는가? 전자와 같은 시험으로는 아무리 공부해도 인공지능에 백전백패한다. 영국의 에이레벨, 프랑스의 바칼로레아, 독일의 아비투어, 핀란드의 일리오필라스툿킨토, 국제 바칼로레아(IB) 등 서구의 고교졸업자격시험 혹은 대입시험은 모두 후자의 형태이다.

- 권위에 대한 저항은 다양한 형태를 띤다. 공부한 두 작품을 참조하여 권위에 어떻게 저항하는지 논하시오. (IB 국어 시험)
- 산업화가 중산층에 왜 그렇게 큰 영향을 미쳤는가? (영국 에이레벨 역사 시험)
- 학교폭력은 지난 몇 년간 증가해 왔다. 그 원인과 효과를 분석하는 신문 기사를 유력 일간지에 게재할 수 있도록 영작 하시오. (독일 아비투어 영어 시험)
- 동학혁명이 일본의 조선 병합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는 주장에 대해 얼마나 동의하는가? (IB 역사 시험)
- 현실이 수학적 법칙에 따른다고 할 수 있는가? (프랑스 바칼로레아 수학 시험)

과목마다 여러 문제 중 택일해 2~3시간씩 쓰는 대규모 표준화 대입시험이다. 객관식 시험이 아니라고 공정한 채점이 안될 거라 지레 단정하지 말자. 이 나라들도 입시의 채점 공정성은 매우 예민하다. 수십 년 간 전국적 대입시험에서 논술 평가를 공정하게 운영해 온 사례들을 면밀히 벤치마킹해 우리도 차근차근 시스템을 구축하면 된다. 어차피 임기 내 완성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곧 출범하게 될 국가교육위원회와 함께 10년 로드맵을 설계해서 당장의 급변이 아니라 향후 우리 교육이 점차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국민들에게 명확히 제시해 줘야 한다.

다행히 대구교육청과 제주교육청에서 IB를 한국어화해 공립학교에 도입한 사례들이 확산되고 있다. 서울대에서도 2021년 ‘대입 논술형 수능 체제 설계를 위한 평가 시스템 및 교원양성 프로그램 기초 연구: IB 사례를 중심으로’ 연구 보고서가 공개됐다. 2024년 대입 진학생 대상으로 첫 한국어 IB 시험이 치러질 예정이라 곧 한국인 IB 채점관들이 양성될 것이다. 이들을 통해 공정한 채점의 글로벌 표준은 무엇인지, 질관리 시스템은 어떤 구조인지, 국내 수능에서는 어떤 설계가 필요한지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학부모 요구가 정시라고 단정하지도 말자. 학부모는 공정해 보이지만 졸업 후 사회가 필요로 하는 능력을 길러주지 못하는 교육이 아니라 공정하면서도 시대가 요구하는 역량을 길러서 대입 후 80년을 더 살아야 하는 자녀 세대가 급변하는 시대에 자생력을 가질 수 있는 교육을 원한다.

현 수능의 정시 확대가 미래 교육 방향이 아니라는 것은 교육감 선거 후보들도 진보·보수 진영을 망라해 지적하고 있다. 학종의 일부 불공정 사례에 대한 실망 때문에 공정 평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고 해서 정시 확대 정책을 택하는 것은, 구한말 외세에 대한 실망 때문에 위정척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고 해서 쇄국정책을 택한 것과 마찬가지다.

시험 문제가 달라지면 길러지는 능력이 달라진다. 수능과 내신이 IB 유형의 평가 패러다임으로 바뀌면 정답 맞히기 문제풀이보다 ‘내 생각’을 꺼내는 토론과 프로젝트가 고득점에 유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교사들의 교수법, 학생들의 공부법이 도미노로 바뀌게 되고 국가교육과정의 목표와 결과의 괴리가 해소될 것이며, 평가 혁신 자체가 사교육 근절책은 아니지만 쪽집게 문제풀이 위주 사교육의 지형 변화도 불가피해질 것이다. 무엇보다 수능과 내신이 이러한 패러다임으로 바뀌면 정시와 수시의 첨예한 대립이 무의미해진다. 정시 확대로도 교육적 타당성과 공정성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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