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최초 한국학과 만든 한국학 학자…학‧석‧박사 과정 설치
“외세 침략에도 주권과 고유문화 지켜낸 두 나라 공통점에 흥미 느껴”
한국-헝가리 간 경제협력 활발…헝가리 내 한국 전문가 양성 필요성 설득
헝가리에서 저명 한국학자로 활동, <대장금> 헝가리 방영 당시 전문가로 참여하기도
2018년 주한 헝가리 대사로 파견…헝가리문화원 설립, 단국대 헝가리연구소 설립 등
한국에 헝가리와의 관계사 널리 알려…이태준‧최승희 헝가리 방문 사진 발굴해 전달
대사 임기 만료 후 고국으로 귀국 “한국학 교수이자 연구자로서 한국에서의 경험 활용할 것”

초머 모세(43) 주한 헝가리 대사는 헝가리에 한국학을 발아시킨 학자로 알려져 있다. 지난 2018년 9월 주한 헝가리 대사에 발탁돼 한국에 머무르며 이제 곧 임기를 마치고 헝가리로 돌아가 한국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나설 계획이다. (사진=한명섭 기자)
초머 모세(43) 주한 헝가리 대사는 헝가리에 한국학을 발아시킨 학자로 알려져 있다. 지난 2018년 9월 주한 헝가리 대사에 발탁돼 한국에 머무르며 이제 곧 임기를 마치고 헝가리로 돌아가 한국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나설 계획이다. (사진=한명섭 기자)

[한국대학신문 허지은 기자] 한국과 헝가리 양국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초머 모세(Csoma Mózes) 주한 헝가리 대사(43)는 헝가리에 ‘한국학’을 발아시킨 학자다. 한국학에 대한 진실한 열정은 그가 가지 않은 길을 가게 해줬다. 역사정치학을 전공하던 그는 모국 헝가리와 다른 듯 닮은 동아시아의 한반도에 관심을 갖게 됐고, ‘한국학’이라는 당시 헝가리에서는 생소한 학문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학과의 인연은 그를 조국을 대표하는 자리로 이끌었다.

2008년 헝가리 최초로 외트뵈시로란드대학교(ELTE)에 한국학과를 설치하고, 이후에는 한국학 석사와 박사과정까지 차례로 설치하며 헝가리 내 한국학 연구의 길을 닦았다. 그의 영향을 받은 헝가리 출신 유학생들이 한국에 정착하기도 했다. 헝가리 내에서 대표적 한국학자로 꼽히며 한반도 역사와 정세를 연구하거나 한반도의 문화에 관련된 일에 전문가로 참여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그러던 중 주한 헝가리 대사에 발탁돼 2018년 9월부터 한국에 머물렀다.

이제 곧 임기를 마치고 헝가리로 돌아가 한국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매진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초머 모세 대사를 지난 6일 주한 헝가리 대사관에서 직접 만났다.

- 헝가리 최초로 한국학과를 만들 정도로 한국학에 지대한 열정을 보여줬다. 어떤 과정을 거쳐 한국학에 빠져들었나.
“1990년대 말 대학을 다녔다. 원래 전공은 역사학, 정치학이었다. 자연스럽게 동아시아 역사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동아시아에서도 특히 한반도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 당시 헝가리에는 한국학 교육과정이나 대학에 한국학과가 없었다. 동부 유럽에 한국학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때다. 반면 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일본학, 중국학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었다. 중국학, 일본학의 경우 20세기 초부터 ELTE대에 교육과정이 있었다. 문화와 역사가 헝가리에도 잘 알려져 있었던 중국과 일본에 비해,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한반도에 대해서는 정보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헝가리처럼 강대국 사이에 있는 한반도에 관심이 갔다. 헝가리와 마찬가지로 한반도도 역사적으로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았다. 양국 모두 여러 차례 역사적인 부침을 겪으면서도 주권과 고유한 문화를 지켜냈다. 그래서 한국 역사를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먼저 한국어를 배웠다. 한 나라의 역사를 연구하려면 먼저 그 나라의 언어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1990년대 말, 헝가리인 선생님으로부터 먼저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북한에서 1970년대에 조선어를 배우신 분이었다. 그 분에게 한국말을 계속 배우다가, 2000년에 한국국제교류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아서 한국에 오게 됐다. 그 덕에 2000년, 2004년, 2005년에 연세대에서 장학생으로 어학연수와 체한연구활동을 했다.”

- 한국과 헝가리의 공통점에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한국과 헝가리는 비슷한 부분이 많다. 두 민족은 아시아 대륙의 중심부에서 유래했다. 헝가리를 세운 ‘마자르족’은 원래 아시아에서 살다가 기후 변화 등으로 유럽 쪽으로 이동했다. 뿌리가 아시아에 있다. 그래서 헝가리 시골에 가면 몽고반점을 갖고 있는 아이들이 있다. 양국의 언어 모두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해 있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헝가리는 유럽에서도 독특하게 한국과 같이 성과 이름 순서를 쓰는 나라다. 주소를 쓸 때도 한국과 같은 순서를 쓴다. 이런 특성 때문에 헝가리 사람들은 우리의 먼 친척은 아시아에 있다고 생각한다.”

- 헝가리와 한반도 간 교류의 역사는 어떻게 되나.
“19세기 말부터 교류가 있었다. 1892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조선 간의 우호 조약(조오우호통상항해조약)이다. 대한제국 시기에도 헝가리 인사가 방문한 일이 있었다. 헝가리의 주교가 고종황제를 알현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헝가리 지식인들이 한반도 독립을 지지하는 글을 쓴 적도 있다. 멀리 떨어진 두 나라는 이렇게 깊은 교류를 맺어 왔다. 한국의 독립 직후 헝가리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주의 국가가 됐고 한반도 내에도 사회주의 체제가 일부 들어오게 되면서 1948년 헝가리는 북한과 외교를 수립했다. 당시 북한이 헝가리에 유학생을 보내기도 했고, 북한 지식인들이 헝가리를 방문하는 일도 있었다. 헝가리는 북한을 통해 아리랑, 한복, 이순신 장군과 같은 역사적 인물과 같은 한반도 문화를 처음 받아들였다. 월북 지식인인 소설가 이태준 선생, 무용가 최승희 선생이 북한대표단으로 이 시기 헝가리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이 때 북한과 수교를 맺은 동유럽 국가들 가운데 체코, 폴란드, 동독에서는 1950년대부터 한국학 교육이 시작됐다. 유감스럽게도 헝가리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다 세계질서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1989년 헝가리는 동구권 최초로 대한민국과 수교를 맺었다. 2019년은 한국과 헝가리가 수교 30주년을 맞이한 역사적인 해다.”

- 동유럽 국가 중에서도 한반도와 교류가 적지 않았던 헝가리였는데, 다른 동유럽 국가에서 한국학이 퍼지는 동안 잠잠했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열심히 연구해 책을 내기도 했다. 《헝가리 최초의 한국학 학자 북한을 만나다. 쇠베니 얼러다르의 1950년대 북한 문화에 관한 기억》(2015)이다. 헝가리 최초의 한국학자라 할 수 있는 쇠베니 얼러다르는 북한 유학생들에게 헝가리어를 가르친 분이다. 북한 유학생과 함께 최초의 헝가리어 한국어사전을 만들기도 했다. 이 학자가 1950년대 헝가리에 한국학 교육과정을 만들려고 시도했다. 이를 위해서는 공산당의 허락이 필요했다. 그러나 쇠베니 얼러다르는 사회주의 체제를 비판했던 학자라 정치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렇기에 쇠베니 얼러다르의 시도 역시 실현되기 어려웠다.”

초머 모세 주한 헝가리 대사는 대학 교수로서뿐 아니라 헝가리에서 한국 문화를 홍보하는 일에도 노력을 많이 기울였다. (사진=한명섭 기자)

- 쉽지 않았던 시도를 해낸 장본인이다. 헝가리에 한국학과를 처음 설치하며 새로운 분야의 학문을 뿌리내렸다. 어려움도 많았을 것 같다.
“세계 어느 나라도 새로운 학문의 교육과정을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왜 그 교육과정이 새롭게 필요한지, 왜 중요한지,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이해관계자에게 잘 설명해야한다. 한국학 교육과정을 설치할 때는 헝가리와 대한민국의 경제적 관계를 많이 이야기했다. 1989년 한국과 헝가리의 외교가 수립되던 즈음, 두 나라 간 경제 협력이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대기업들이 헝가리와 활발히 무역을 했다. 그렇기에 헝가리 내에 한국어가 능숙할 뿐 아니라 한국 문화를 잘 이해하는 전문가가 많이 필요하다는 점을 설명했다. 많은 분들이 한국학과의 필요성을 공감했다. 학생 모집은 어렵지 않았다. 안 불러도 올 정도였다. 2008년 헝가리에 한국학과를 만들었던 당시 이미 헝가리에 한류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1999년 연말에 영화 ‘쉬리’가 개봉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2008년에는 ‘대장금’이 유럽에서는 최초로 헝가리 국립방송에서 방영됐다. 헝가리에서 방영된 첫 한국 사극이었다. 대장금은 재방송만 6번을 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 헝가리에서 대표적인 한국학자로서 다방면으로 활동한 것으로 안다.
“대학 교수로서뿐 아니라 헝가리에서 한국 문화를 홍보하는 일에도 노력을 많이 기울였다. 헝가리에서 한국 사극이 인기를 끌면서, 그 과정에 한국학 전문가로 참여하게 됐다. 한국 드라마를 방영할 때, 자막이 아닌 더빙으로 대사가 전달된다. 또한 사극은 한국 전통 문화와 역사가 배경이 되기에, 단순한 한국어 해석이 아닌 한국 문화에 대한 소개가 필요했다. 그래서 헝가리 사람도 쉽게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대사를 번역하고 드라마 속 문화를 소개하는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후에도 ‘선덕여왕’, ‘이산’, ‘동이’ 등 한국 사극을 방영하는 데 있어 전문가로 지속 참여했다. 또한  다양한 학술대회 외에도 TV, 라디오 매체들을 넘나들며 시사토론에서도 한반도 전문가로 여러 차례 초대를 받았다. 여러 기회가 있어 헝가리 사람들에게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할 수 있었다.”

- 2019년 한-헝가리 수교 30주년을 맞이하던 때 헝가리 대사로서 많은 일을 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서울에 헝가리문화원을 설립한 것이다. 헝가리어 수업도 들을 수 있는 곳이다. 또 30년간 이뤄지지 못했던 서울-부다페스트 간 직항 노선 신설도 이룰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코로나19 전까지는 일주일에 3번, 서울과 부다페스트를 오갈 수 있었다. 지금은 이 노선이 일주일에 2번 취항하는 것으로 안다. 수교 30주년을 기념해 한‧헝가리 친선협회도 조직했다. 친선협회 회장을 맡은 노재헌 국제변호사는 한국과 헝가리가 처음 수교한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이다. 2019년에 단국대에 헝가리연구소를 설립한 일도 있었다. 헝가리 외교부의 지원으로 헝가리에서 파견 나온 객원 교수가 헝가리어와 헝가리 문화를 가르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단국대에서 헝가리 대학에 한국어 교원을 파견해온 인연이 있다.
30주년 기념으로 <한반도-헝가리 관계사 희귀사진집>도 발간했다. 이 사진집에는 의미 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헝가리 통신사의 아카이브에서 중요한 두 장의 흑백사진을 발견했다. 하나는 단국대와 관련이 있는 사진이다. 1949년 부다페스트에서 개최된 제2회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북한대표단 사진인데, 여기에 중요한 인물 한 명이 있다. 무용수 최승희 선생의 수제자 김백봉 선생이다. 김백봉 선생은 단국대 무용과 교수를 지낸 분이다. 그래서 김백봉 선생께 이 사진을 직접 전달했다. 또 하나는 소설가 이태준 선생이 1950년 헝가리를 방문했을 때의 사진이다. 조선여성동맹 초대위원장인 박정애와 함께 찍은 것이다. 이 사진은 2020년 11월, 이태준 선생의 외증손녀인 조상명 수연산방 대표에게 전달했다. 수연산방은 성북동에 있는 이태준 선생이 살던 곳으로, 당호도 이태준 선생이 직접 지었다. 쇠베니 얼러다르가 만든 한국-헝가리어 사전을 헝가리에서 아주 어렵게 구할 수 있었는데, 이 역시 2019년 국립한글박물관에 기증했다.”

'한반도-헝가리 관계사 희귀사진집'에 담긴 이 두 사진에는 초머 모세 대사의 특별한 사연이 담겨 있다. 왼쪽은 1949년 부다페스트에서 개최된 제2회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북한대표단 사진으로, 사진 속 대표단 여성 중 오른쪽 두번째 인물이 무용수 최승희의 수제자였던 김백봉 단국대 교수다. 왼쪽 사진은 소설가 이태준(사진 왼쪽)이 박정애 민주여성동맹위원장과 1950년 12월 1일 부다페스트를 방문한 사진이다. 사진 속 우측 남성은 당시 헝가리 문화교류청장이었던 미하이 에르뇌.
‘한반도-헝가리 관계사 희귀사진집’에 담긴 이 두 사진에는 초머 모세 대사의 특별한 사연이 담겨 있다. 왼쪽은 1949년 부다페스트에서 개최된 제2회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북한대표단 사진으로, 사진 속 대표단 여성 중 오른쪽 두 번째 인물이 무용수 최승희의 수제자였던 김백봉 단국대 교수다. 오른쪽 사진은 소설가 이태준(사진 왼쪽)이 박정애 민주여성동맹위원장과 1950년 12월 1일 부다페스트를 방문한 당시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 속 우측 남성은 당시 헝가리 문화교류청장이었던 미하이 에르뇌.

- 한국학에 대한 연구는 물론, 한국과 헝가리의 관계사에 대한 많은 책을 펴내기도 했다.
“한국과 헝가리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연구하고 책을 펴내는 것은 일로서가 아니라 취미로 좋아하는 일이다. 오래된 자료와 사진을 찾아내는 과정 자체가 즐거움이고 기쁨이다. 지금도 발간 준비 중인 책이 세 권이나 있다. 천천히 자료를 수집하며 준비할 계획이다.”

- 곧 임기를 마치고 헝가리로 돌아가게 된다. 앞으로의 계획은.
“헝가리에 돌아가면 다시 한국학 교수로 대학 강단에 설 예정이다. 그동안 연구도 계속하려고 한다. 지난 4년간 주한 헝가리 대사로서 한국에서 했던 경험을 많이 활용하게 될 것 같다. 연구와 강의에 매진하며 그간의 모든 경험을 알차게 풀어내고 싶다.”

■ 초머 모세 대사는…
1996년부터 2002년까지 헝가리 ELTE대학교에서 역사학과 정치학을 복수전공했다. 1997년부터 2000년까지 부다페스트 대외무역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공부했다. 2000년, 2004년, 2005년 장학생으로 연세대에서 어학연수와 체한연구활동을 했다. 2007년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후 ELTE대 동아시아학부 교수로 임용됐으며 2008년부터 2017년까지 한국학과 운영책임자였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 한국학과 학과장을 역임했다. 2018년 2월 부다페스트 NKE대(University of Public Service) 안보전략연구소 수석 연구교수가 됐으며, 같은 해 9월 주한 헝가리 대사로 파견됐다. <한반도를 방문한 헝가리인들의 기억 비망록>(2009),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1956년 헝가리 혁명과 북한 유학생들>(2013), <헝가리 최초의 한국학 학자 북한을 만나다. 쇠베니 얼러다르의 1950년대 북한 문화에 관한 기억>(2015) 등의 저서를 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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