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위대한 시인이자 극작가, 연극 이론가, 연출가인 브레히트는 지금으로부터 1백년전 2월10일, 독일 남부지역의 아우그스부르크의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작품은 동구권에서는 정치성 때문에, 서방에서는 예술성 때문에존중받았지만, 나치의 박해를 피해 여러 나라를 떠돌았던 개인적인 삶은 불우했다. 59년의 생애 가운데 작품활동이안정되었던 시기는 마지막 8년 정도에 불과 하다.

유복한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부르주아 생활법에 적응하지못했던 그의 '반부르주아적 기질'을 이끌어낸 사람은 외할머니이다.

어린 시절부터 문학적 재능을 떨치던 그는 15세 때 필명으로 교지에 글을 발표했으며, 고교시절엔 장르를 넘나들 며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한다.

대학시절, 희곡작가 프랑크 베데킨트의 영향을 받으면서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이 때 쓴 희곡이『반쪽 코미디 바알』(1918).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 야전병원의 위생병으로 +근무하면서 반전주의자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다음 뮌헨으로 이주, 극작가 포이히트방어, 희극배우팔렌틴과 교분을 쌓으며 본격적으로 희곡을 쓰 기 시작해『소시민의 결혼』,『한밤의 북소리』(1919)를 썼다. 이즈음 클라이스트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베를린으로진출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24년의 베를린 이주. 이곳에서 그의마지막 반려이자 서사극의 명배우 헬레네바이겔을 만났고, 마르크시즘에 접속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베를린 이주 초기, 그는『남자는 남자다』(1925) 등을 썼고 극의 무대진행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장치로 서사극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음악극『서푼짜리 오페라』(1928)를 무대에 올려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 즈음부터 마르크시즘에 본격적으로 몰두하는한편, 교육극에 대한 높은 관심을 표명했 다.

33년, 그는 히틀러의 압정을 피해 프라하, 취리히, 루가노, 파리 덴마크, 스웨덴 등을 전전하다 결국 망명을 선택, 41년 미국 할리우드 부근의 산타 모니카에 정착했다. 그리고 49년베를린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일생의 역작을 배출 했다. 『갈릴레오의 생애』(1939), 『주인 푼틸라와 하인 마티』(1940), 『사천의 선인』최종 개작, 『시몬느 머셜의 환각』(1943), 『코카서스의 백묵원』(1945) 등이 망명기의 작품들.그리고 이 시절부터 시작(詩作)과 연극론에만 전 념했다.

하지만 안정적인 생활도 잠시. 매카시 선풍에 휘말린 그는 재치와 기지로 위기를 넘기지만 다시 파리, 스위스를 전전하며 동독으로 돌아왔다. 49년의 일이다.

베를린으로 회귀한 그는「베를리너 앙상블」을 창립했고, 주위에서는 현대연극의 개혁자라고 극찬했다. 그리고 베를리너 앙상블의 런던 공연이었던『코카서스의 백묵원』의 연습도중 심장마비로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56년8월14일의 일이다.

지금은 헬레네 바이겔과 구 동독의 도로테엔슈타티셔교회 묘원에 나란히 누워있는 그가 남긴 작품은 2천5백편에 달하는 방대한 시와 희곡 47편, 미완성 희곡 8편, 영화 시나리오 4편 등. 그는 자신의 업적과 함께 각종 표절시비, 모순된 사고, 이중적인 정치태도 등 숱한 논란과 파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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