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호 본지 논설위원·중앙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이미지가 특권을 누리는 시대가 도래했다. 우리는 주체·언어·진리·초월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사라지는 재현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거대담론들을 대신해 이제 이미지가 유령처럼 우리 주위를 떠다니고 있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이미지’는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이미지는 한마디로 문학·회화·사진·영화·광고 등에서 사람·사물·사건에 대한 정신적 또는 시각적 재현이다. 이미지는 또한 세계를 간접적으로 비교하는 은유·환유·비유 등의 수사학적 장치이기도 하다. 이미지는 과연 실재의 충실한 재현자인가? 모사물인가? 아니면 아름다운 반역자인가?

이미지는 전 지구적 소비자본주의 시대에 동일성 철학에 다름 아닌 재현철학에 저항할 수 있는 기계장치가 될 수 있다. 이미지는 결코 단순한 의미의 모사·모방이 아니다. 이미지는 언어 이전 상상계의 시공간이다.

이미지의 시공간은 차이와 반복의 세계이며 모든 개념과 사물이 이분법화되지 않고 반복적으로 차이를 만들어 내며 탈영토화된다. 이미지는 차이에서 출발해 창조과정을 반복한다. 반복은 단순한 모방적 과정이 아니다. 이미지는 확정적이 아니고 잠정적이고, 논리적이 아니며 우연적이다. 이미지는 언제나 미꾸라지와 같이 미끄러지는 기표다. 이 시지점(視地点)에서 이미지는 자아-타자인 아름다운 반역자로 생성·변형된다. 이미지는 어원적으로 ‘미숙한 형상’이다. 그러나 이 ‘미성숙’은 약점이 아니라 장점이다. 미성숙은 완결되지 않은 과정에 놓여 있으므로 오히려 저항·개입·위반·전복·생성의 가능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우리 시대를 초월할 수 있는 다른 동력선이며 ‘탈주의 선’이 될 수 있다. 물론 이미지가 불순하게 조작되고 특정한 목적으로 생산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미지를 무조건 경계하고 멀리해서는 안 된다. 융복합 그리고 통섭의 시대에 새로운 문화윤리학은 이미지 복합학의 수립일 것이다.

현 단계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미지가 무엇인가보다도 그것이 무엇을 해낼 수 있는가다. 이미지는 엄청난 문화윤리학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미지를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것보다도 우리 자신이 이미지를 생산·창출해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이미지는 나쁜·반동적이지 않은 좋은·저항적인 이미지다. 더 나아가 새로운 시대를 위한 비전을 줄 수 있는 대안·쇄신적 이미지가 바람직하리라.

우리 미래의 바람직한 개인의 주체성과 이상적인 공공의 정체성을 수립하기 위한 변혁적 이미지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자. 이미지는 이미 언제나 우리 사회의 욕망과 이념의 표상기재가 아닌가. 이미지는 구속이면서 동시에 해방의 기재다.

이미지는 이런 의미에서 미래를 위한 하나의 교육체계가 될 수 있고 ‘이미지를 읽고 만들 수 있는 능력(image literacy)’으로서의 이미지학은 필수과목이다. 앞으로 우리 문화의 운명은 우리가 이미지를 어떻게 해석하고 창조하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지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태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미지를 소비자본주의 문화의 첨병으로 비난하는 태도와 새로운 가능성으로만 보려는 열광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마치 삶에 대한 비관주의나 낙관주의가 모두 지나친 단순화인 것과 같다. 이미지에 대한 가능성 탐구와 실천은 대화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언제나 담장에 걸터앉아 양쪽을 모두 바라보는 ‘중간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모든 것은 시작도 끝도 아닌 중간(과정)에서 생겨난다. 중간지대는 역동적인 대화와 위대한 창조의 공간이다. 이미지는 현실과 이상, 실재와 모사, 자연과 인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동양과 서양, 과거와 미래 등을 연결시켜 주는 열린 중간지대다. 이미지에 대한 응분의 경계만 주어진다면 우리에게 이미지의 미래는 ‘제3의 공간’의 무한한 가능성으로 넓게 펼쳐질 수 있다.

일생 동안 많은 논문이나 저작을 만들어 내는 것보다 하나의 창조적인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 훨씬 훌륭한 일이다.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일은 현재를 포섭하면서 우리의 미래를 위한 밑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현재가 미래 속에 있듯이 미래도 현재 안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쇄신의 이미지학은 이미 언제나 유토피아의 미래학이다. 미래에 대한 욕망과 꿈이 없다면 고단하고 척박한 현재를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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