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생각을 담는 그릇”


대규모 국제행사인 제4회 파주북시티 국제출판포럼이 지난 19, 20일 이틀 동안 파주출판도시에서 열렸다. ‘책의 진화와 디지털 출판의 미래’를 주제로 열림 포럼에는 제임스 데이터 하와이대 미래학연구소장, 앤드류 앨버니스 퍼블리셔스 위클리 편집장, 호시노 와타루 문화통신사 편집장, 캐롤린 리디 사이먼앤슈스터 회장 등 세계적인 석학과 국내외 유명 출판관계자들이 모여 책의 미래에 대해 논의했다.

파주를 책의 도시로 변모시킨 데에는 누구보다도 이기웅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도서출판 열화당 대표)의 공이 컸다. 지난 2003년 설립한 재단은 파주를 자연과 도시, 출판과 예술이 조화를 이루는 곳으로 만들었고, 서울 중심의 문화예술을 저변으로 확대하는 데 일조했다. 빠르게 변하는 디지털 시대에 책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 이사장을 만나 물었다.

“파주출판도시의 콘셉트는 도서관 도시이자, 박물관 도시예요. 이곳 열화당 전시관은 이런 일 중 일부라고 보면 됩니다. 좋은 것도 많고, 나쁜 것도 많은데 제대로 된 것을 가리는 일은 아주 어렵고도 중요하지요.”

이 이사장을 만난 열화당 사무실 내부에는 그가 개인적으로 모은 책들이 전시된 공간이 있다. 수천여 권의 고서와 희귀도서는 개인 전시관이라고 하기엔 상당한 규모를 자랑한다. 그가 열화당 전시관을 ‘일부’라고 말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열화당이 내부에 전시관을 만들고 모습을 드러내듯, 다른 출판사 역시 나름의 모습으로 파주출판도시를 만드는 데 일조하기 때문이다. 수십여 개의 출판사가 제 역할을 하며 파주출판도시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열화당을 세운 후 이렇게 다른 출판사들과의 공동체를 마련하기까지, 그는 20년 동안 “초심을 잃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런 그의 나이는 벌써 일흔을 바라본다.

“그동안을 돌이켜보니 우리나라는 말이 ‘격동’이지 사실은 지금까지 너무 무지하지 않았나 싶어요. 한 번 걷어차면 무너지는 모래성 같은 나라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면에서 일제시대를 돌아보면, 애국지사는 어려웠던 시대에 자기성찰과 고민이 있었던 사람들이었어요. 안중근 의사 같은 사람들 말입니다.”

그는 열화당이 개정판을 낸 <안중근 전쟁 끝나지 않았다>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일흔을 바라보는 그는 삽십대에 서거한 안중근을 ‘멘토’이자 ‘스승’이라 말한다.

“서른의 젊은이가 동양평화론을 내세워 한·중·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평화를 교란하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해 치밀한 작전을 세웠어요. 단순히 개인으로서 미워서가 아니라 전략가로서, 의병중장으로서 백년 후의 나라를 보고 벌였던 전투였죠. 사형을 언도받고 집행될 때까지 5개월에 이르는 기록들을 보면 안중근 의사의 생각의 깊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안중근 사랑은 파주출판단지에 그대로 묻어 있다. 1980년대 말부터 십여 년간 파주에 쏟았던 노력이 결실을 맺기까지, 그는 어려울 때마다 안중근 정신을 삶의 지침으로 삼고 이겨냈다. 파주출판도시에 처음으로 지은 건물에 안중근을 정신적인 감리인으로 모시는 행사를 했던 이유다.

“설계를 멋대로 변경하고, 뒤집어엎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 했어요. 파주출판단지가 서기까지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감리인이 설계대로 잘 짓는지, 원래 개념에 맞게 만들고 있는지 지켜봐야 했죠. 저는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한마디로 ‘신독(愼獨)’이라고 표현합니다. 파주출판단지는 이런 신독의 정신 위에 세워졌어요.”

신독이란 글자 그대로 ‘혼자 있을 때 근신한다’는 의미다. 혼자 있을 때 나를 속이지 않고 몸가짐을 바로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인간이란 혼자가 되면 약해지거든요. 바로 그 인간의 약점을 억누르는 게 신독정신이에요. 그런 책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어요. 자기를 속이지 않는 책,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책을 만들려고 했죠. 베스트셀러를 지향하는 사람들, 그게 넘치면 자기를 향해 날카로운 비수가 돼 날아오곤 한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지난 1971년 한국에서는 아직 이르다고 말하던 미술과 시각매체, 그리고 한국전통문화 분야의 출판에 뛰어들어 출판계에 한 획을 그은 열화당에 대한 자부심이기도 하다. 그는 그동안의 경험들에 비추어 “책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고 말했다.

“수메르 문자라든가 갑골문자를 보면 알 수 있어요. 기원전 3500년경 고대인들은 말에 영혼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에도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혼돈이나 카오스에서 빛이 비춰 코스모스가 되는 것처럼 애매한 것이 구체적인 생각으로 만들어지는 게 바로 책입니다. 그동안 만들었던 책들도 그렇고, 파주출판도시도 마찬가지였죠. 어린이 같은 모호한 생각들이 근사한 것으로 태어난 것 같아요.”

그의 말대로 생각과 책 그리고 안중근과 파주출판단지는 모두 연결돼 있었다. 생각이 책이 되듯, 몇 만 제곱미터의 대규모 파주출판단지는 사실 그의 생각에서 출발했다. 생각이 빗나갈 때마다 안중근 정신으로 다독였다. 큰 성과물을 내놓았지만, 그는 안주하지 않고 여전히 파주출판도시의 미래를 꿈꾼다.

“제발 좀 쉬라는 이야기도 있지요. 그렇지만 어떤 역할만 준다면, 역할만 결정된다면 열심히 해야죠. 파주출판단지는 이제 2단계로 진입합니다. 영화와 영상 쪽으로 발전하리라 보고 있지요. 개인적으로는 안중근 라이브러리를 준비 중이고요. 일은 많은데 글쎄요, 인생이 너무 짧은 것 같아요.”

대담=이정환 국장/ 정리=김기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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