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한 이래로,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이미 청년들은 사회의 걱정거리였다. 현재 한국의 청년들, 이른바 ‘88만원 세대’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이들에 대한 꾸중의 합주에서 두 가지 큰 목소리를 가려 낼 수 있다. ‘고생을 싫어하는 나약한 청년들’ 그리고 ‘사회 전체에 대한 고민이 없는 청년들’.

두 큰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들이다. 오늘날 청년들은 이들 영웅적 세대들의 눈에 차지 않는다. 이들의 걱정은 충분히 이해된다. 전쟁의 폐허 더미 속에서 절대적 빈곤에 시달리며 ‘죽도록 고생’해 경제적 ‘기적’을 이룩한 산업화 세대. 이들의 눈에 청년들은 “냉난방 잘되는 사무실(대통령의 라디오 연설)”과 같은 쾌적한 현실에만 안주하려는 나약한 존재다.

‘사회와 조국을 위해’ 독재정권과 싸워 정치의 민주화를 이뤄 낸 민주화 세대. 사회의 잘못된 규칙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스펙 쌓기에만 열중하는 88만원 세대는 답답할 뿐이다. “너희처럼 처신하면 밥 되기 딱 좋다.”(김용민)

시각의 차이는 필연적이다. 성인들은 언제나 청년들을 현재가 아닌 과거, 즉 자신들의 청년기 경험에 의거해 판단하고 평가한다. 하지만 청년들의 눈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겨냥한다. 이 시점의 차이를 사회학은 ‘동시대인의 비동시성’이라 표현한다. 이것은 전통 계승과 현실 변화의 충돌이 예정된 것임을 보여 준다.

혁신적 변화가 전통 계승을 압도할 때 영웅적 세대가 출현한다. 산업화 세대는 경제적 근대화의 과업을 수행할 수 없었던 기성세대를 공격했다. 민주화 세대는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못했던 성인 세대를 부정했다. 같은 맥락에서 그들은 후속 세대들을 가르치려 한다. 문제 해결의 열쇠는 치열했던 청년 영웅의 경험에 있다. 이렇듯 영웅들은 성공의 경험이 있기에 할 말이 많다.

목소리 크다고 옳은 것은 아니다. 이들 영웅들은 자신들의 시대가 지났음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영웅의 시대는 이미 역사가 됐다. 현재 청년들이 직면한 문제는 과거와 확연히 다르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먹고사는 것과 정치는 중요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근본적인 의구심과 불안감이다. 모든 것에 대한 의혹! 안정적인 것이 없음에서 오는 불안감! 과거 청년들은 불가능한 목표를 달성하거나, 절대 갈 수 없었던 목적지에 도달해 자신들의 영웅스러움을 뽐냈다.

현재 청년들은 가치 있는 목표도 이상적인 목적지도 없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실현하고 도달했을 때 그것들이 약속한 바가 지켜질지를 믿을 수 없다. “이곳이 아닌가 봐”라며 다른 곳을 다시 찾을 여유도 없다. 살인적인 경쟁은 방황이나 우회로를 허락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게다가 졸업장·직장·사랑도 경쟁의 대상이 된 지금, 높고 높은 목표나 멀고 먼 목적지가 가당키나 한가. 영웅의 충고, ‘미래를 위해 오늘은 참아야 한다.’ ‘좋은 대학 가면 고생 끝, 행복 시작!’ 그런데 웬걸, 더 살벌한 취업 경쟁이 도사리고 있다.

‘중동의 사막’에서도 정리해고의 칼바람은 세차다. 그럴 바에야 냉난방 잘되는 쾌적한 곳에서 칼바람을 준비하겠다. 보장할 수 없는 미래의 과실로 청년들을 설득할 수 없다. 영웅의 두 번째 조언, ‘중요한 것은 정치다’ 정치 혐오와 무관심은 청년의 전유물이 아니다. 본인들도 지키지 못하는 어설픈 충고는 조롱거리일 뿐이다.

청년들만이 청중인 영웅적 세대의 ‘꾸중의 이중주’는 그래서 불편하다. 과거의 영웅들은 이제 예외적 존재로서 특별 취급받을 수 없는데 왜 그들은 자신도 지키지 않는 기준으로 청년들을 재단할까?

훈계는 이제 그만 “됐고!”(드라마 '지붕 뚫고 하이킥'의 명대사) 정치가 중요하다면 모두 함께 고민하고, 불확실성이 문제라면 모두 함께 그 해답을 찾자. 지치고 우울한 청년의 좁고 여린 어깨에 무거운 ‘영웅적 과업’을 동의도 없이 얹지 말잔 말이다.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