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진 본지 논설위원·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한 대학생의 자퇴 선언은 대학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왜 충격으로 받아들였을까. 그의 자퇴는 엄격히 말해 우리 시대의 요구를 실행에 옮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것에 도전하라!’ 도전을 칭송하고 권장하는 이 사회는 그러나 그의 도전에 ‘충격을 먹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앞서 말한 바처럼 우리 시대 최고의 규범은 도전이다. 성패 여부에 상관없이 도전은 아름다운 것으로 칭송된다. 도전의 핵심은 변화다. 도전은 이전과 이후의 경계를 설정하며, 그 이전과 이후는 서로 다르다. 도전이 성공했다면, 어떤 변화가 실현된 것이다. 설령 도전이 실패했다손 치더라도 변화는 찾아온다. 실패를 곱씹는 좌절도 변화이며, 재도전의 의지를 불사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도전이 칭송되는 이유들도 변화와 연결된다. 우리는 변화의 시대에 산다. 문화·제도·기술은 말할 것도 없고, 규범과 가치도 변화한다. 변화의 시대에 변화하지 않으려는 것은 정체, 즉 현실에 안주해 뒤처지는 것을 의미한다. 도전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유혹을 떨치며 뒤처지는 것을 거부하는 의지이며 행동이다. 엄격히 말하면, 변화를 거부하는 것도 도전이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도전에 대해 현대사회는 관대하지 않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확실한 미래가 부재한 상황에서 변화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삶을 ‘무책임’하게 방기하는 일이다. 무책임하게 도전하지 않는 ‘그들’은 도전하는 ‘우리’들을 초라하게 만든다. 도전이라는 버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이 옳다고 믿는 우리를 웃음거리로 만든다.

둘째, 모든 이가 공유하는 불안과 두려움에 동참하지 않는 ‘그들’은 도전하는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도전하는 우리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미래가 보장되지 않음을 안다. 혹시 그들의 전략이 우리보다 더 나은 것은 아닐까? 이러한 의구심은 이미 불안한 우리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도전을 권장하는 사회는 그것의 양면성을 애써 무시한다. 도전은 축복이자 저주다. 도전은 축복이다. 열심히 도전한 우리는 성공에 즐거워한다. 설령 실패했더라도 상관없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기에 그것에 만족한다. 도전은 그러나 저주다. 사회의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더라도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 지금 내가 가진 것에 기꺼워하며 조촐하지만 이렇게 살고 싶다. 좁고 지저분하고 시끄럽지만 바로 이곳에 정착하고 싶다. 도전은 이러한 안주와 정착의 욕망을 저주한다.

도전을 권장하는 사회의 또 다른 문제는 사회적 불평등을 무시하는 데 있다. 풍족한 자원을 지닌 사람들은 ‘무모한 도전’을 할 수 있다. 풍부한 자본들은 성공의 가능성을 높이고, 실패의 위험을 덜고, 실패의 참혹한 결과를 완화한다.

이에 반해 자원이 부족한 사람들은 도전에 지극히 소심하다. 실패할 경우 생존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모한 도전이 경우에 따라서 현실적 도전보다 더 현실적일 수 있다. 현실적 도전에는 경쟁자들이 많이 몰리기에 오히려 그 성공 가능성이 낮아질 수 있다. 도전할 수 있는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 결과만으로 사람들을 평가하는 것은 그래서 문제를 생성한다. 기존의 성공한 사람들을 다시 긍정하고, 이미 실패한 사람들에게 더 큰 낙인을 찍는 일이 될 수 있다.

도전에 대한 문제제기가 체념과 비관론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자세는 도전의 찬가를 현실화하고, 도전의 불평등한 여건을 정당화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도전을 문제시하기, 즉 ‘도전에 도전하기’다.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다.

먼저 모든 것을 변화하려는 행렬에 참여하지 않는 변화, 더 이상 도전하지 않음으로써 지배적 견해에 도전하는 방식이 있다.

다른 하나는 도전의 영역을 더욱 확장하려는 노력이다. 주류 도전정신은 ‘상품화’, ‘현금화’에서만 유효하다. 정치적 도전은 죄악시되며, 생태적 도전은 멸시되고, 미학적 도전은 굶주리기에 딱 좋다. 많은 사람들이 김예슬의 도전을 충격으로 받아들인 이유는 바로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도전의 영역이 지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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