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 기피 원인은

고용 불안에 대우도 기대 못 미쳐

우리나라 이공계 기피현상의 뿌리는 고 3학생들의 ‘문과 편중’ 현상에서 찾을 수 있다. 학생들이 고등학교 과학 교육에 흥미를 잃고 있기 때문이다.

국립과천과학관이 지난 1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학생평가 보고서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 학생들의 과학 흥미도는 57개 국가 중 55위에 머물렀다. 태국(3위)이나 아제르바이잔(7위), 인도네시아(8위) 등 개발도상국에 비해서도 순위가 크게 뒤쳐진 것은 충격적이다.

■ ‘실험’ 없는 과학교육에 흥미 잃어=학생들이 과학 수업에 흥미를 잃는 이유는 입시위주의 교육 때문이다. 우리나라 과학교육은 실험과 실습이 배제된 채 진행된다. 고 3이 되면 그나마 한 해 한두 차례 있었던 실험수업조차 사라진다. 국·영·수 위주로 시간표가 배정되고, 과학과목은 답을 채워 넣는 이론식 수업으로 채워진다.

영동일고등학교 김용해 교사는 “학생들이 이과를 선택하지 않는 이유는 과학·수학 등의 과목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며 “실험이 배제된 채 이론만으로 진행되는 과학수업에서 학생들이 과학에 흥미를 못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말했다.

과학 교육의 부실화는 대학의 학부·대학원 교육에도 영향을 미친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은 의대·치대로 빠지고, 정작 과학기술로 특화된 대학에는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의·치전원 도입된 이후에는 대학원 과정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KAIST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이기환(가명·27)씨는 “요즘 만나는 학부생 가운데는 가끔 ‘어떻게 우리 학교에 들어왔나’ 싶은 학생도 있다”며 “이공계는 정말 뛰어난 인재 몇 명을 발굴하는 게 중요한데, 학생들이 아예 이공계 진학을 기피하고 있어 우수 인재가 더 없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과학교육에서 흥미를 느끼지 못하더라도 진로만 밝다면 문제의 심각성은 덜할 것이다. 이공계 학생들의 고민은 무엇보다 일자리다. 대학입학 후 남학생의 경우 박사과정을 마치는 데만 12년이 걸리고, 박사 후 과정까지 15년 이상이 필요하다.

■정부 출연 연구기관도 비정규직 ‘절반’=박사 후 과정을 마쳤다고 ‘질 좋은’ 일자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약대나 의대 출신은 관련 면허를 취득하면 수월하게 직업을 구할 수 있지만, 이공계 출신은 양질의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다.

이공계 학생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직장은 대학 교수나 정부출연 연구원이다. 서울의 한 이공계 교수는 “대학 교수나 국책 연구원 모두 신규 채용이 지원자에 비해 극히 적다”며 “이공계 학생들이 안정된 직장에 취업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4월에 있었던 보건·식품 분야 국책 연구원 77명을 뽑는데, 총 2257명이 응시했다. 권영근 연세대 생화학과장은 “특히 생명과학 분야는 고용난이 훨씬 심각하다”며 “외국의 경우 국책 연구원 자리도 많고, 대형 제약회사에서도 연구 인력을 많이 필요로 하지만 국내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장래에 불안함을 느낀 학생들이 의전원을 택하는 게 당연한 결과”라고 덧붙였다.

힘들게 일자리를 구해도 고용 불안은 여전하다. 연구직에도 비정규직이 많기 때문이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이 지난 2008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교과부 산하 13개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고용인원 9890명 가운데 무려 46.8%인 4633명이 비정규직이었다. 국책 연구기관의 절반가량이 2년 정도의 계약기간이 끝나면 실업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얘기다. 임금도 정규직의 절반 수준이다.

전국 공공연구노동조합 강준용 사무처장은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비정규직 채용을 축소하고, 정규직 이공계 고용인원을 늘려야 한다”라며 “연구기관의 고용 조건이 개선되지 않으면 이공계 기피 현상은 막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공계 나오면 지방서 살아야”=생산 기반이 지방에 편중된 것도 이공계 기피의 원인이 된다. 김형준 고려대 재료공학과 교수는 “이공계 학생들의 경우 지방으로 취업할 수밖에 없어 (이공계 진학을) 더 꺼리게 된다”고 말했다.

올해 한 제약사 품질관리부에 입사한 이세진(가명·26)씨는 취업과 동시에 충남 아산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서울이 고향인 그는 회사가 제공하는 기숙사가 따로 없어 따로 집을 구했지만, 출퇴근 시간만 40분이 걸린다. 아직 주택가가 형성되지 않아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주택가에 거처를 얻었기 때문이다.

정씨는 “회사 동료 중엔 대출을 받아 집을 구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며 “매달 내는 집세도 문제지만, 집에서 회사까지 오는 교통편이 선배 차를 얻어 타며 매번 눈치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지방의 자동차 회사에 입사한 김정우(가명·26)씨도 사정은 비슷하다. 입사 후 경기도 화성으로 내려온 김 씨는 “대형 회사들의 제조기반이 지방에 있기 때문에 이공계 출신은 취업을 해도 울산·화성·전주 등 지방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다”며 “퇴근 후 영어학원도 다니고 친구도 만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게 아쉽다. 서울에서 직장을 잡은 친구들이 부러울 때가 많다”고 말했다.

■짧은 수명, 떠나려는 두뇌들=기술 주기가 짧은 것도 이공계 인력에겐 부담이다.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는 성영호(가명·40)씨는 대학에서 전자 계산학을 전공했다. 당시 그는 시스템 소프트웨어 개발을 맡았지만 3년을 못 버티고 퇴사했다. 그는 “관련 분야의 기술발전 속도가 너무 빨라 따라가기 어려웠다”며 “더욱이 발주사들의 횡포로 주 7일 내내 근무하는 일도 많아 체력이 남아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시스템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은 ‘35살을 못 넘기고 퇴사한다’는 게 업계 정설이다. 근무 강도가 그만큼 높은 점도 이유지만, 처우도 열악하다. 시스템 소프트웨어 분야의 임금만 비교해도 한국은 203만원, 미국은 653만원, 일본은 599만원이다. 김씨는 “30대 초반이 되면 자기가 회사를 차리지 않는 이상 퇴사하는 분위기”라며 “당시 같이 일했던 팀원들도 모두 퇴사했다”고 말했다. 김 씨는 퇴직 후 전공을 바꿔 사회복지사로 제 2의 삶을 살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떠나려는 인재가 많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은 지난 7월 국내 이공계 박사 중 8.4%인 8100명이 국외로 이주할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다. 국내 이공계 박사들의 해외 이주 가능성을 연구한 자료에 따른 것이다. 이는 지난해 이공계 박사학위 취득자의 1.34배에 달하는 수치다.

시스템 소프트웨어 개발자에서 사회복지사로 전업한 성 씨는 “훗날 내 자식이 의대·약대가 아닌 이공계를 진학하려 한다면 말리겠다”며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직업적으로도 불안한 이공계를 권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뇌과학 연구의 꿈 접고 취업 준비”
숭실대 자연과학대학 조소미씨의 고민

“10명 중 8명은 의전원이나 약대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의전원·약대 진학을 생각하지 않던 친구들도 분위기에 휩쓸리게 된다. 그렇지 않은 친구들은 공무원 시험이나 공사 취업을 준비하지, 대학원 진학을 생각하는 학생은 거의 없다.”

숭실대 자연과학대(의생명시스템학부) 3학년에 재학중인 조소미씨는 올해 초 고민 끝에 졸업 후 취업 쪽으로 진로를 바꿨다. 이공계 출신이 직면하게 될 불투명한 장래와 경제적 부담 때문이다. 설사 대학원에 진학한 뒤 장학금을 받는다고 해도 생활비는 직접 벌어야 한다는 것도 걱정이다.

대학들도 이공계 학생들의 의전원·약대 진학을 독려하는 분위기다. MEET(의학교육입문검사)나 PEET(약대입문자격시험)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고시실과 동영상 강의실을 제공하고 있다. 심지어는 MEET·PEET 시험 응시료나 학원비를 지원해 주는 대학도 있다. 의전원·약대 진학률이 대학 위상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조 씨는 “서울 소재 대학 중에는 의전원 입시를 위해 직접 학원강사를 초빙해 오는 경우도 많다”며 “대학에서도 의전원에 들어간 선배들을 불러 성공담과 공부요령을 듣지 연구원으로 들어간 선배는 부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학에 의전원·약대 준비생이 늘어나자 타 학과 학생들의 모습도 자주 눈에 띈다고 한다. 의전원·약대 입시 때 요구되는 선수과목을 채우기 위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다. 과목 성적을 높이기 위해 일부러 다른 단과대에 개설된 과목을 듣는 경우도 있다. 조 씨는 “약대를 준비하는 학과 동기는 공대에 개설된 생물학과 수업을 듣기도 한다”며 “공대 생물학과가 전공수업보다 학점을 더 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중·고교 시절부터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던 조씨는 대학원에 진학해 뇌과학을 연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올해 초 학부 졸업 후 기업에 취업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지난 학기부터 이를 위해 부전공으로 경영학 수업을 듣고 있다. 그는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 공부해도 취업이 힘들다는 이야기가 들리는 이공계에서 대학원에 진학하겠다는 학생은 많지 않을 것”이라며 “학생들이 의전원이나 약대에만 몰리는 것도 문제지만, 국가가 이공계를 기피하게 만든 구체적인 원인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하영·조용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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