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진 본지 논설위원·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한국인들은 분명 야구를 좋아한다. 프로야구, 국가대표 야구 대항전, 그리고 일반인들이 즐기는 사회인 야구까지 야구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하지만 일 년 내내 야구를 즐길 수는 없는 법. 야구도 야구인도 휴식이 필요하다.

야구 공백기로 인한 금단증상을 염려했던 것일까. 최근 한 사내는 야구가, 더 정확히 말해서 야구 방망이가 늘 우리 곁에 있음을 보여줬다. 그 사내는 회사의 원활한 운영에 걸림돌이 된 사람을 야구 방망이로 ‘치죄(治罪)’했다. 역시 큰 기업 사장님답게 그 대가도 지불했다.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사내의 ‘능력’과 ‘업적’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골프채나 빗자루도 사용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몽둥이의 종류를 가리지 않는 타격 실력, 더불어 길을 가리지 않는 운전 실력도 갖추었다. 그뿐인가. 애견을 사무실에 들이는 동물사랑, 그리고 ‘자고로 머슴들은 잘 먹어야 일을 잘해’라는 신조로 회사식당을 중시하는 따스함까지 지닌, 참 균형 잡힌 사람이다.

그런데 이 사내의 모습에서 두 가지 이미지가 교차된다. ‘사형(私刑)’을 행하며 종업원들을 머슴이라 생각하는 봉건제후, 그리고 시가 총액 385억원의 기업 사장. 배우기로는 자본주의는 봉건적 사회관계와 양립할 수 없다. 그런데 최근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변화는 교과서적 지식으로 설명할 수 없다. 독일의 사회학자 지그리트 넥켈은 위르겐 하버마스의 표현을 빌어 이를 ‘사회의 재봉건화’로 묘사한다.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봉건적 사회관계가 부활한 것으로 번역할 수 있는 이 변동은 크게 두 바퀴로 추동된다. 먼저 사회구조적 측면, 즉 불평등의 성장과 고착이다. 경제적 세계화의 결과 부는 거의 무한대로 증가했다. 하지만 부의 향연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들은 더욱 적어졌다. 향연의 초대권은 이른바 자수성가한 사람들에게도 새로이 배포되지만, 많은 경우 상속된다. 하지만 상속이 물적 자산에만 한정된다고 보면 곤란하다. 최근 있었던 전 외무부 장관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부모의 신분은 특채라는 간접적 방법을 통해서 상속된다. 학력의 대물림도 잊어서는 안 된다.

두 번째 기둥은 규범적인 측면, 말하자면 지배적인 사회적 가치의 변화다. 근대 자본주의의 규범적 지주는 바로 업적주의(meritocracy)다. 업적주의 이념은 사회의 필연적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동시에 노력하는 동기를 부여한다. 사회적 지위와 재산은 뛰어난 업적을 쌓거나 출중한 능력을 지닌 사람의 몫이므로, 이에 대해서 시샘이나 질투를 해서는 안 된다. 현재의 상황에 불만족한 사람들은 업적을 쌓고 능력을 키워 그 위치로 올라서거나 재산을 축적하면 된다. 과거에 업적주의 규범이 정말 현실에 부합했는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믿었고, 그에 따라 사회적 평화(수면 아래 엄청난 불만이 있을지언정)가 이룩됐고, 사람들은 목표를 향해 꾸준히 달렸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자본주의의 지배적 가치는 이제 시장에서의 성공, 즉 행운이다. 공들여 업적을 쌓고 미래를 위해 능력을 키우는 것은 이 시대, 빠른 변화와 불확실성, 그리고 불안정성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서는 너무 구태의연하다. 세계화된 시장에서의 투기자본의 활약이 이를 입증한다. 잘 투자해 단기간에 대박을 터트리는 것이 더욱 유망하다. ‘좋은 투자’의 성패는 말할 것도 없이 행운에 달려 있다. 시장에서 성공할 행운이 없다면 대체물이라도 있어야 한다. 부모를 잘 만나거나 로또가 당첨되거나...행운에 자신을 맡기는 자세, 이것은 바로 전통사회의 지배적 아비투스다.

야구 방망이를 들어 몸소 치죄한 바로 그 사장님은 아마도 외롭지 않을 것이다. 이미 사회는 충분히 봉건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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