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 논설위원 / 이화여대 교수

오사마 빈 라덴 피살 이후, 미국과 이슬람권 사이엔 미묘한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듯하다. 이슬람에 대해 거의 무지한 상태에 있는 우리네로선 공포와 분노 사이에서 서성일밖에.

아랍지역 분쟁에 관한 한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뉴욕타임즈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의 주장에 따르면, 이슬람 무장단체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극단적 선택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유인 즉, 9.11 테러에 상징적으로 투영되었듯 미국이 혐오와 질시의 대상이라는 사실, 더불어 아랍국가들 내부의 고질적인 빈익빈 부익부와 빈곤의 악순환에 주목해야한다는 것이 프리드먼의 진단이다.

과거 냉전체제 하에선 적과 동지가 분명했고, 양 체제의 생존을 책임지는 초강대국 미국과 소련이 존재했으나, 탈냉전 하에선 적과 동지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은 채 갈등과 대립의 축이 점차 다변화되어 가고 있으나, 정작 어느 누구도 문제 해결을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 유일의 패권국으로 등장한 미국이 세계 도처에서 반미(反美)의 표적이 되고 있는 한편으로, 부정과 부패 그리고 빈곤과 불평등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수많은 민중들과 친미주의적 석유 재벌 간의 양극화가 날로 깊어만 가는데 아랍권의 고민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랍 내에서 이들 문제의 심각성을 간파한 집단은 중상류층 출신 서구 유학파 소수 지식인들이라 한다. 이들은 무소불위의 파워를 행사하는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아랍의 권력층과 공고한 유대관계를 유지한 채 다수 민중의 삶을 외면하고 있는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선, 자포자기의 늪에 빠진 무기력한 자국 민중을 설득하기보다, 지하로 들어가 극단적 폭력에 의존하여 세계를 향해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보다 주효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국가 대 국가의 대결을 넘어 글로벌 시대 새로운 대립의 축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초국적 개인들”의 강력한 저항임에 주목하라는 것이 프리드먼의 충고이다. 그간 오사마 빈 라덴을 공격하기 위해 미국이 무려 개 당 1백만 달러가 넘는 미사일을 75개나 발사했다지 않은가. 더 더욱 9.11 테러는 인간 상상력의 한계를 모조리 넘어선 각본이었다는 사실, 자살 폭탄을 감행한 테러리스트들은 전통적 의미의 테러리스트 범주에 한번도 포함된 적 없는 젊은 엘리트들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일이다.

프리드먼이 주목하는 또 하나의 현상은 갈등의 축이 더욱 다변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아랍권은 물론이요 세계 곳곳에서 미국을 향한 혐오와 질시가 가시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오늘날 유럽에서 부상하고 있는 반미주의를 면밀히 들여다보면, 확실히 70년대 반미와는 그 색깔을 달리한다는 것이다. 예전의 반미는 “미국이 한 짓”(What America Does)을 향한 반감이었다면 오늘의 반미는 “미국의 존재 양식”(What America Is) 자체에 대한 질시와 경계심이 주를 이룬다는 것이다. 즉 예전엔 민주주의를 이상으로 내세우면서 뒤로는 독재정권을 지지하는 미국의 위선에 화살이 맞춰졌기에 반미가 좌파의 전유물에 머물렀다면, 오늘날은 할리우드 영화, 팝 뮤직, 패스트푸드, 명문대학, 그리고 MS 애플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매력”이 반감의 타깃이 되면서, 극좌파에서부터 극우파에 이르기까지 반미에 심정적 동조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의 매력에 무방비 상태로 빨려 들어가는 유럽의 차세대를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는 유럽의 엘리트들이 반미를 주도해가면서, 오늘의 미국은 저주의 대상이자 매혹의 대상이요, 몬스터이기도 하고 모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의 저력을 부인하긴 불가능할 게다. 미국은 오래전 패퇴한 베트남 전쟁의 상흔을 지금도 여전히 되새김질하듯 세계를 경악케 한 9.11의 상처를 오래도록 상기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요, 아직은 글로벌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미국이 “선의의 권력자”일 때만이 글로벌 체제가 안정성과 질서를 유지해갈 수 있음을 미국의 지성들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작 붉은색 경고등은 우리 앞에 켜져 있는 것 같다. “문명 충돌”이 세계적 수준의 갈등과 분쟁을 야기하는 주요 축이 될 것이란 예견에도 불구하고, 아랍권 전문가 하나 변변히 키워내지 못한 풍토에서 우리네에게 아랍은 여전히 미개한 세계요 폭력의 상징이자 무지한 대상은 아닐른지. 덕분에 오래 전부터 위험을 경고하는 신호들이 번쩍였건만, 우리와는 무관한 일이겠거니 방심하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요, 국제 정치의 복잡한 동학 하에서 합리적 대처방안 대신 행여 뒷북만 치는 격이 되는 건 아닌지, 깊은 성찰의 미덕이 그 어느 때보다 아쉬운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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