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진 논설위원 / 시론

최근 ‘세대 정치’라는 말이 여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정치적인 지형에서 세대를 중심으로 어떤 균열이 있으며, 각 세대들이 나름의 독특한 정치적 지향, 무엇보다 투표 성향을 보이고 있음을 지칭하는 용어다. 지난 재보선의 결과를 보면 연령대별로 어느 정도 상이한 투표 성향이 관찰되었다. 총선과 대선이 겹치는 ‘슈퍼 선거의 해’인 내년에도 이런 추세가 유지, 강화, 아니면 소멸될지 주목된다. 그렇기에 세대 정치가 관심을 끈다.

유치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런 주목이 나쁘지 않다. 스스로를(물론 만약을 위해 준비한 또 다른 명찰도 있지만) 세대사회학자라 소개하는 필자로서는 자신의 연구 관심에 많은 이들이 주목하는 상황이 반갑다. 그러나 문제는 있다. 필자는 아쉽게도 정치적인 의미에서 세대 균열에 확신하지 못한다.

필자는 세대의 정치적 균열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본다. 하나는 소극적인 조건이다. 정당의 이념적 혹은 정치 프로그램의 스펙트럼이 넓어야 세대 균열이 보인다. 잘 알려진 바처럼 한국의 정당들은, 특히 두 개의 거대 정당들은 이념적으로나 정치 프로그램에서 대동소이하다. 이런 상황에서 정당 지지의 차이에서 세대 균열을 추론하기는 매우 어렵다.

또 다른 조건은 적극적인 것, 즉 정치적인 의미에서 도드라지는 특성을 지닌 세대의 존재다. 정당 지형이 협소하더라도 특정 세대가 나름의 목소리를 뚜렷이 낸다면 이를 우리는 세대 정치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에는 뚜렷한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세대가 없다. 한때 정치적 세대의 전형으로 평가받던 386(혹은 486)세대는 정치적 장에서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그들의 정치적 비전도 흔적조차 사라졌다.

기성세대가 된 386의 정치적 “존재감”의 소멸,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무관심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청년의 경우는 다르다. 청년세대의 정치적 무관심은 걱정거리다. 대체 왜 그럴까?

살인적인 경쟁과 사회의 불안정화, 특히 안정적 일자리가 희소해지면서 현재 청년세대는 불안과 공포에 떨며 ‘나 홀로 생존하기’에 급급하다. 바로 이것이 정치적 무관심의 근본 원인이다. 나 먹고 살기도 힘든데 정치 같이 골치 아픈 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청년세대의 ‘생존주의’와 정치적 무관심은 기성세대의 큰 걱정거리다. 이 걱정의 근거는 바로 “청년신화”다. 청년신화는 오래전에 독일에서 태어났다. 18세기말 독일은 프랑스와 같은 혁명도, 통일국가도 만들지 못했던 사분오열된 초라한 약소국,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런 것들의 덩어리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은 희망의 기대주로 호명되었다. 나라가, 사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청년이 해결책을 제공할 것이라는 기대에 찬 믿음, 바로 이것이 청년신화다. 청년들이 주목받은 이유는, 그들이 세파에 시달린 기성세대와 달리 탐욕스럽지 않으며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고 지고지순한 가치를 위해 헌신하며 놀라운 해결책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청년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회 쇄신”의 과업을 진 주체로 간주되었다.

그 이후 청년신화는 굴곡진 독일 역사에서 면면히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 신화는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넘어 오늘날 한국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한다.

청년신화는 안 그래도 좁은 청년들의 입지를 더 왜소하게 만든다. ‘생존주의’가 그들만의 특성은 아니다. 당대를 사는 모든 이들의 피하기 어려운 숙명이다. 정치적 무관심이 그들에게만 나타나지 않는다. 모든 이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다. 하지만 청년신화는 청년들의 특성, 사회의 지배적인 흐름과 결코 다르지 않은 그들의 특성들을 문제로 만든다. 이렇게 기성세대는 청년신화라는 책임전가의 도구를 통해서 안 그래도 무거운 그들의 어깨에 짐 하나를 더 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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