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미래를 위한 제언

인문학자가 살아남는 탄탄한 토양 만들어야

#1. “뭐 전공하세요?” “철학과입니다.” “고시 안 하세요?” “저는 공부를 계속하려고요.” “에이, 곧 알게 되겠지만 인문학에는 미래가 없어요.”
나는 그 순간 어떤 표정으로, 무슨 말을 했어야 했을까. 일단은 내가 인문학도이기 때문에, 마음 한쪽에서 “도대체 인문학에 대해서 얼마나 아시기에”라는 말이 기지개를 펴고 입으로 뛰쳐나오려 하는 것을 겨우 눌러 진정시켰다. 내가 인문학도이고 아니고를 떠나, 정말 인문학에는 미래가 없는 것일까. 사실 스스로도 많이 던져본 질문이기는 하다.
- 블로그 ‘궁상맞은 애드립(cogito91.egloos.com)’ 발췌

#2. “오늘날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담론의 장을 펼치게 된 것은 수돗물은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벽 뒤에, 그리고 땅속에 묻혀 있는 수도관을 통해서 나온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인문학의 위기를 외치는 인문학자들의 목소리는 머리띠를 두르고 거리에 나온 각종 이익집단의 목소리와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 <비평> 2006년 겨울호에서 발췌. ‘인문학과 인간적인 것’ 김우창

전국 인문대학 학장들이 나서서 ‘인문학의 위기’를 외친 지 5년여가 지난 지금, 여전히 인문학 위기를 외치는 목소리가 높다. 대학 안팎에서는 각종 인문학 강연이 붐을 이루고 있으며, 서점에서는 인문학 서적들이 히트를 치고 있는 상황. 이런 상황이라면 인문학의 위기를 외치는 목소리가 점차 줄어들어야 하는데 위기를 외치는 목소리는 여전하다.

지금 상황을 두고 ‘인문학의 위기’가 아닌 ‘인문학자의 위기’라는 지적이 나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권호종 한국연구재단 인문학 단장(경상대 중어중문과 교수)은 이 문제에 대해 “그동안 논의됐던 ‘인문학의 위기’는 사실상 ‘인문학자의 위기’였다”며 “인문학자들이 취업할 곳이 없다든가 맡을 수업이 줄어든다 하는 게 마치 인문학의 위기처럼 여겨졌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지만 다른 쪽에서는 “인문학자들이 위기를 맞는다면 결국 인문학도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 항변한다. 국내의 인문학을 이끌어 가는 것은 이들 인문학자고, 이들을 받아줄 수 없는 지금의 구조는 다시 인문학을 위축하게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표면적으로는 인기를 끌고 있는 인문학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고, 나아가 인문의 토양이 탄탄해지려면 결국 인문학을 받아들이는 인프라가 바뀌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결국 이를 위해서는 교육 시스템에 인문학이 스며들도록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권 단장은 “최근 인문학 관련 대중 강좌가 인기를 끌고 있어 인문학 붐이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인기를 넘어서 ‘교육’과 함께하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며 “대학에서 인문학을 가르치기 위해 여러 가지 강좌를 마련하고 있지만, 인문학은 사실 초등학생 때부터 교육을 통해 체득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광철 한양대 인문과학대학장은 나아가 인문학의 세계화를 말했다. 이 인문과학대학장은 “중국의 경우 중문학과가 있는 대학이 1000개가 넘는데 국내에서 중문학을 해봤자 이들을 따라갈 수 있겠느냐”며 “동양과 서양의 대학들과 함께해야 국내 인문학도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인문과학대학장은 “한양대의 경우 동아시아문화연구소를 통해 한·중·일 동아시아 교류를 추진하고, 비교역사문화연구소를 통해 서양 인문학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수행인문학을 통해 융합을 꾀하고 있다”며 “인문학 교육이나 연구에 있어서 세계화는 지금 상황에서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인문학 준비하는 한양대
국경 넘어서는 연구 ‘트랜스내셔널 인문학’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가 국내에서 유일하게 범국가적 패러다임을 인문학에 적용한 ‘트랜스내셔널 인문학 대학원 협동과정’(석사과정)을 오는 2학기부터 시작한다.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은 현재 비교역사문화연구소를 대표하는 연구 프로젝트다. 지난 2008년 한국연구재단 인문한국(HK) 지원사업에 선정돼 2018년까지 10년 동안 총 사업비 80억원을 받는다.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의 기본적인 목표는 인간 삶의 차이와 경험의 다양성을 ‘보편’의 이름으로 지워버리는 제국의 인문학과 ‘특수’의 이름으로 본질화하는 민족의 인문학을 거부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국민국가의 틀 밖에서 인류와 미래에 대한 새로운 사유와 상상력을 논의하자는 것이다.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는 “현재 서구·비서구의 관계를 중심·주변, 지배·피지배의 위치에 고착시켰던 근대적 위상학을 해체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대학원 협동과정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 커리큘럼 외에 해외석학 단기집중 강좌, 트랜스내셔널 인문학 비행대학(여름학교), 해외 유수 대학과의 학점 교환 프로그램, 국제기구 인턴십, 전원 장학금 등 다양한 교육과 지원을 제공한다.



 

“원하던 인문학 공부하게 돼 기뻐”
[인터뷰]한양대 트랜스내셔널 석사과정 진학하는 류호진씨

“학업 계획서에 이렇게 적었어요. ‘교수가 되고 싶다는 말은 잘못된 것 같다. 교수는 직업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난 학자가 되고 싶다’라고요. 졸업 후 뭐가 되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지금 당장 답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우선은 공부를 하고 싶고 연구를 하고 싶습니다.”

1983년생 류호진씨<사진>. 동국대 사범대 역사교육학과 04학번이다. 재작년 졸업 후 기간제 교사로 일하다 인문학을 공부하고 싶어 한양대를 찾았다. 아이들에게 국사를 가르치면서 교과서에 배어 있는 민족주의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문제의식으로 느낀 게 계기였다. 얼마 전 일본 원전 사고 이후 일본을 대하는 누리꾼들의 태도도 그를 대학원으로 이끌었다.

“왜 이와 같은 폐쇄적인 민족주의가 한국인들에게 있는 걸까 문제의식을 느꼈어요. 그리고 이 분야를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해서 찾은 곳이 바로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입니다.”

류씨는 즉각 이메일을 보내 위에서 말한 것들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고 밝혔다. 비교역사문화연구소에서는 “이번 2학기에 ‘트랜스내셔널 인문학’ 과정이 생기는데 생각이 있으면 지원해 보라”는 답변을 보내왔다. 류씨는 지원했고, 합격했다. 합격자는 단 2명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원하던 인문학 분야에 발을 들여놓게 됐지만, 교사 일을 그만두고 대학원에 오기까지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는 게 류씨의 설명이다.

“대학원을 택하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동기들은 계약직 기간제 교사로 몇 년 동안 경력을 쌓고 사립학교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처럼 인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 가는 것은 좀 특별한 케이스죠. 친구들은 모여서 주식 이야기를 하는데 저는 ‘인문학’이라니. 그래서 ‘내가 이 모임에 어울리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도 했고, ‘뒤처지는 것 아닐까’ 하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돈벌이가 마땅찮은 인문학을 택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고민이었다. 그리고 트랜스내셔널이라는 분야가 워낙 생소한 까닭에 ‘잘한 일이었을까’ 하는 고민도 이어졌다고 한다.

“트랜스내셔널이라는 게 워낙 생소하다 보니 잘 선택한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게다가 국내에서는 처음 시도되는 거잖아요. 이쪽 분야 연구가 워낙 적었기 때문에 ‘우선 도전해 보자’는 생각도 들었어요.”

류씨는 “인문학을 공부하려는 수요는 충분하다고 본다”며 “그렇지만 공부를 마친 이후에는 미래를 알 수 없으니 다들 섣불리 도전을 못하는 거 같다”고 말했다. 인문학의 미래를 생각할 때 정부의 지원이 이어져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류씨는 이에 대해 “인문학 공부가 이어질 수 있도록 여러 장치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연구소 등과 연계한 인턴십을 운영하는 방법이라든가, 인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해외진출을 수월히 할 수 있도록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이야기다.

초보 인문학자로의 길을 걷게 된 류씨는 최근 2학기 학습계획을 꼼꼼히 챙기고 있다. 좋아하는 분야여서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고 있다며 즐거운 모습이다.

“근대 국민국가와 그 경계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는 기존 민족주의 역사서술과 이와 관련된 제 통념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새로운 인문학적 사유부터 시작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후엔 유럽의 변경사에 대해서 공부해 보고 싶어요.”

트랜스내셔널에 대한 연구가 편협한 내셔널리즘의 기능을 무장해제시킬 수 있는 하나의 좋은 무기가 될 것을 꿈꾸며, 초보 인문학자는 그렇게 발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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