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인정하지만 아무도 해결해 주지 않는다?’ 열악한 시간강사 처우를 놓고 벌어지고 있는 최근 상황이 바로 그렇다. 교육부는 “강사 처우개선안을 마련했지만 예산문제로 예산당국이 수용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기획예산처는 “국립대가 기성회비를 통한 자구노력을 선행해야 한다”는 논리를 편다. 행정자치부는 “현행 교수직제상 시간강사 소속을 어디로 둘지 난감하다”고 하고, 각 대학은 “지금 예산도 빠듯한데 국고 추가지원 없이 강사료 인상은 쉽지 않다”며 서로 등을 떠미는 모양새다. 최근 보건복지부는 한술 더 떴다. “월 노동시간이 80시간 이상 되는 단위사업장에 한해 직장의료보험, 건강보험이 적용될 수 있는데, 기존 사업장과의 형평성 문제로 강사에 대한 보험적용은 어렵다”는 게 보건복지부의 입장. 당연히 노동의 내용이 거의 흡사한 전임교수와의 형평성 문제는 어디로 갔냐는 항변이 나올만하다. 또 “강의에 수반되는 강의준비, 채점, 연구 등은 노동이 아니라는 일천한 인식에 말문이 막힌다”는 한 강사(비정규교수노조 변상출 위원장)의 비판도 모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관료화는 복잡다단해지는 현대사회를 효율적으로 관리, 운용하기 위한 필연적 산물이다. 부처별로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고, 협의와 조율을 거쳐 최종적으로 정책이 집행되는 과정까지 무수한 불협화음도 존재한다. 이에 따라 ‘합리적’ 시스템 속의 관료들은 일처리 절차도 모르면서 떼만 쓰는 집단 이기주의가 못내 얄미울 수 있다. 일만 있으면 민원과 감사청구와 송사를 끄집어내는 사람들도 좀 많은가? 하지만 시민사회에서 상식 수준인 얘기를 관료 논리로 거부할 때, 답답한 사람들의 심정도 있다. ‘대학교육의 절반’이라는 강사들이 목을 메달고, 이혼하고, 생계가 위협받고 그 결과 대학교육은 부실해지는 악순환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그런데 ‘합리적’인 관료들은 너무도 침착해 보인다. 결국 청와대로 달려가는 수밖에 없다는 그들을 보며 ‘관료유감’을 느낀다면 지나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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