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진 본지 논설위원/대구가톨릭대 언론광고학부교수

미디어 제국의 황제라 불리는 루퍼트 머독이 최근 자신이 소유한 타블로이드 신문 <뉴스 오브 더 월드>가 저지른 해킹과 도청 스캔들로 곤혹을 치르고 있다. 정치인 등 유명인사는 물론 납치된 소녀의 휴대전화 내용까지 해킹한 파렴치한 사실도 드러났기 때문이다. 도청 피해의 당사자들은 말할 나위없고 동종업계에 종사하는 언론인들에게도 그러한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전 세계 언론들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한 것만 보더라도 그 파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와 유사한 의혹이 우리나라에서도 발생해 요즘 한국의 언론계는 뒤숭숭하다. <뉴스 오브 더 월드>와 같은 황색 저널리즘 매체도 아닌 한국 최대의 공영방송 KBS가 그 도청의혹 논란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국회 민주당 대표의원실을 도청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KBS는 경찰의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여러 가지 납득하기 어려운 태도로 국민으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다. 도청의혹을 받고 있는 해당 기자 자신의 휴대폰과 노트북이 석연찮게도 이른바 ‘녹취록’과 함께 불거진 도청의혹 사건 며칠 뒤 한꺼번에 분실되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도청이 이뤄졌다는 당일 자신은 다른 취재로 국회 내에 없었다는 알리바이 주장도 거짓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경찰이 도청의혹의 당사자로 지목된 장 모 기자를 참고인에서 피의자 신분으로 바꾼 것은 사건 혐의를 더욱 구체적으로 확보했을 것이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KBS 안팎의 여론도 매섭다. 안으로는 기자와 피디들이 집단적으로 사측을 향해 납득할만한 해명을 요구하며 나섰고 밖으로는 시민단체 등이 연일 명확한 입장을 표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게다가 며칠 전 KBS 노동조합이 자사구성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KBS가 도청사건에 연루되었을 거라고 답변한 비율이 무려 97퍼센트에 이르렀고 도청의혹과 관련된 사측의 주장을 신뢰할 수 없다는 답변도 96퍼센트나 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상황이 이 정도면 사건의 종결 여부와는 관계없이 이미 공영방송으로서의 KBS 위상과 신뢰는 바닥에 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국가기간방송으로서 “공정하고 건전한 방송문화를 정착”시키겠다는 KBS의 설립목적이 무색할 정도로 현재 KBS는 스스로 난항을 거듭하며 좌초의 위기를 맞고 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도청의혹 사건으로 KBS 구성원 전체를 획일적으로 매도하는 것은 경계해야한다. 여론의 대부분은 언론윤리정신을 망각한 일부 기자들과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는 사장 및 경영진을 탓하는 것이지 취재와 제작현장에서 묵묵히 본분과 책임을 다하며 노력하는 대부분의 언론인들에 대한 믿음까지 저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언론윤리는 비록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그 기준은 보편타당하다고 확신하는 사회적 가치에 대한 기자의 신념이다. 그리고 언론의 자유와 책임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책임지지 않는 자유는 방종이요, 자유 없는 책임은 굴종일 뿐이다. 현재 KBS의 모습은 방종과 굴종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황에 처한 것 같아 무척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 어느 누구도 공영방송 KBS의 침몰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향후 조사결과를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책임질 일이 있다면 떳떳하게 지고 또 이를 계기로 KBS가 진정으로 환골탈태하는 자세를 분명하게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공영방송으로서의 역할에 더욱 충실해질 수 있고 나아가 우리사회의 건전한 언론풍토 형성에도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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