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고·영재학교 출신 최소 1년간 배운내용 '재탕 수업'

▲ 과학고 과학영재학교 학생들의 서울대 선호는 갈수록 높아가는데, 서울대는 과학영재들을 위한 관리체계를 마련하지 않고 있다. 사진은 교내 한 카페에서 공부하는 서울대 학생들.

[한국대학신문 이우희 기자] 서울대에 진학한 과학영재들이 최소 1년 간 사실상 방치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학고(이하 과고)와 과학영재학교(이하 영재학교) 출신 학생들인 과학영재들이 가장 선호하는 대학은 서울대지만, 정작 서울대는 과학영재를 위한 특별 과정이나 관리체계를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과학영재 육성분야 관계자들은 이들 과학영재들은 대부분 고등학교 재학 중에 대학 과정을 마치고 대학에 진학하기 때문에 이미 들었던 기초 전공과목을 또 들으면서 시간과 능력을 낭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대가 과학영재들을 위해 마련하고 있는 프로그램은 첫 수강신청 전에 일부 강의에 한해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성취도측청평가를 시행, 고급과정을 수강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것이 전부다. 그나마 수준별 선택이 가능한 전공과목은 극히 제한적이다. 자연과학대학의 경우 신입생들이 수강 가능한 과목은 물리, 물리1, 물리2로 제한된다. 희망하는 신입생들을 '물리학성취도측정시험'을 치러 성적이 높으면 고급·심화 강의 수강 자격을 얻을 수 있다.

시험은 의무가 아니라 희망자에 한해서 치른다. 서울대 기초교육원 관계자는 “물리학성취도측정시험을 보는 이유 자체가 고급물리학 수강을 희망하는 학생들에게 수강 자격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올해 초 입학한 2013학년도 신입생들의 경우 총 112명이 시험을 치러 40명이 고급물리학 수강 자격을 획득한 것으로 확인됐다. 한 영재학교 교사는 “학생들 입장에서는 다른 학생들과 학점 경쟁을 벌여야 하는데 굳이 어려운 고급물리를 듣기보단 일반물리를 듣고 만다”며 “실효성이 없는 제도”라고 평가절하했다.

서울대 자연과학대학과 공과대학에는 해마다 수백 명의 과고나 영재학교 출신 과학영재들이 입학한다. 2013학년도 서울대 전체 입학생 3361명 가운데 과고와 영재학교 출신은 11.6%(389명)나 됐다. 전체 정원의약 80%(2680명)를 선발한 수시모집으로 한정하면 과고, 영재학교 비중은 14.4%(385명)에 달한다. 결국 신입생 과학영재 380여 명 가운데 스스로 희망한 40명만이 한 개 과목이나마 자기 수준에 맞는 강의를 들을 수 있었고 나머지는 사실상 방치되고 있는 셈이다.

서울대와는 달리 이공계특성화대학들은 과학영재 관리를 위한 시스템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해 4개 영재학교(체결 당시. 현재 6개교) 와 5개 이공계특성화대학 간에 체결한 ‘3+3 교육과정’ 협약이다. 협약에 따라 영재학교 학생들이 KAIST와 포스텍 등 이공계특성화대학에 진학하면 3년 이내 조기졸업이 가능하다. 심사를 통과하면 학생들이 고교에서 이수한 AP(대학과목선이수제)학점을 대학 학점으로 인정해 주기로 한 것. 다만 KAIST 입학처 관계자는 “AP학점 있다고 다 인정해 주는 것은 아니다”라며 “학생들이 이수한 AP교육과정을 면밀히 검토해 학점인정 여부를 결정 한다”고 전했다.

■ 과학영재 방치 1년...“타성 젖을까 염려” = 권장혁 전 한국과학영재학교(이하 한국영재고) 교장은 서울대의 관료주의를 질타했다. “당시 영재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서울대 관계자들을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현실적인 대책을 요청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 국립대학으로서 특정 학교 출신만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은 힘들다는 얘기였다.” 다른 일반고교와의 형평성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권 전 교장은 “이유야 어찌 됐든 과고와 영재학교 출신들이 서울대에 들어가면 ‘1년은 논다’는 사실 자체는 문제가 아니냐. 국가로 봐서도 엄청난 손실이다. 국가를 위해 무엇이 이익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라며 “가장 염려되는 것은 아이들이 타성에 젖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관계자는 "과학영재학생들이 처음 1,2학년 때는 성적 최상위권이지만 3,4학년이 되면 일반고교 출신과 같아지거나 오히려 낮아진다"고 말했다.

■ 서울대, “대학서도 선행학습 하라는 격” = 서울대측은 과학영재들을 위한 특별 관리·지도는 서울대의 교육방침에 어긋난다는 입장을 밝혔다.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핵심 관계자는 “대학이란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았을 때 스스로 연구하고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곳”이라며 “과학영재들은 사실상 초중고를 이어오며 선행학습에 익숙해져 있는데, 우리나라 과학이 발전하려면 대학에서 그 선행학습의 고리를 끊어야한다”고 말했다. AP학점 연계를 도입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그는 “대부분의 고교생들이 따오는 AP학점은 여름방학 등을 활용해 특별 수강으로 점수만 딴 것인데, 그걸 인정해 달라는 거다”라고 반박했다.

서울대의 입장에 대해 과고와 영재학교 관계자들은 현실을 모르는 얘기라고 말했다. 수도권 영재학교의 한 진학 담당 교사는 “이공계특성화대학의 AP학점 인정 제도는 해당 고교의 AP과정을 종합 검토하고 담당 선생님에 대한 인터뷰까지 거칠 정도로 검증이 철저하다”며 “대학 수준 수업으로 인정하기에 손색이 없다 싶으면 학점 인정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AP학점 인정 제도의 도입을 거부하는 서울대의 입장은 변명일 뿐이라는 지적이다. 또 서울대가 지적하는 선행학습의 폐해는 일부 과고에 한정된 이야기라고 봐야한다. 한국영재고의 경우 입시를 위한 선행교육은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 ‘입시 스펙용’으로 인기인 올림피아드 출전도 지원하지 않는다. AP과정도 수준이 대학 못지않다. 서울대의 입장이 영재학교 관계자들에겐 ‘제대로’ 교육받은 과학영재들마저 외면하는 관료주의로 비쳐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 ‘그래도 서울대’...과학 멍드는 학벌주의 = 서울대가 특별 관리를 해 주지 않아도 과학영재들의 서울대 선호는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한 수도권 영재학교 진학부장은 “졸업생들은 2000년대 전까지만 해도 대체로 KAIST 진학을 당연시했다. 최근에는 거의 무조건적 맹목적으로 서울대를 선호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영재학교 학생들이 서울대에 가서 얻을 수 있는 메리트는 기성 부모세대가 기대하는 것과 동일한 ‘명문 학벌’ 외에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며 “학벌이 가장 큰 서울대 진학 이유”라고 한탄했다.

실제 과고와 영재학교의 서울대 진학률은 전국 최정상을 달린다. 2013학년도 서울대 합격자수 1위는 과학영재학교인 서울과학고로 86명이 합격했다. 서울과학고의 입학정원이 120명인 점을 감안하면 70%에 육박한다. 한 영재학교 진학교사는 “서울대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영재학교 안에서도 우수한 학생들로 과학분야 0.1%의 인재들인 셈”이라고 전했다. 과고와 영재학교의 최초합격자 기준 2013 서울대 합격자수는 경기과학고(영재학교) 62명, 세종과학고 42명, 한성과학고 39명, 경남과학고 24명, 경기북과학고 19명, 인천과학고 18명 등이다.

과학영재들의 서울대 선호는 고질적인 학벌주의와 지방대 외면 때문이라는 데 관계자들은 입을 모았다. 경기과고의 한 교사는 “서울대 진학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무조건적인 선호가 문제”라고 말했다. 부산 소재 한국영재고의 한 교사도 “영재들을 만나보면 대체로 얘는 서울대가 좋겠다, 얘는 KAIST나 포스텍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과학을 넘어서 넓은 분야를 접하면서 즐길 수 있는 학생은 서울대가, 그보다는 학문적으로 깊이 파고드는 성향을 가진 학생들은 KAIST나 포스텍이 어울린다”고 설명했다.

지방대학 외면도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한 영재학교의 진학 담당 교사는 “사실 냉정하게 말해서 포스텍이 굉장히 좋은 학교다. 교육적 환경이 뛰어나다. 무엇보다 각 분야 정상급의 교수들이 학생들을 케어하는 시스템이 서울대가 따라 하기 힘들 정도로 탁월하다. 공부도 가장 많이 시킨다. 포스텍을 가보면 ‘명품학교’라는 생각이 절로 들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영재학교 학생들에게 포스텍은 지방에 있다는 이유로 외면 받는 것이 현실. 실제 서울과학고 경기과학고 한국영재고에서 포스텍에 진학하는 학생 수는 서너 명에 넘지 못하고 있다.

박근혜정부는 창의적인 인재와 기업을 육성해 남을 따라하는 경제에서 남을 선도하는 경제로 탈바꿈 하고자 하는 ‘창조경제'를 기치로 내걸었다. 과학영재들은 창조경제를 이끌 핵심 인재인 만큼 지속적인 관심과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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