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시장논리 접근해선 국가발전 없어
지적 인프라 구축위해 ‘번역청’ 설립돼야
역사적 연속성 살고 지식의 민주화 달성
평가시스템 등 개선 목소리는 지식인 책무

[한국대학신문 정윤희 기자] “우리는 우리가 읽는 것으로 만들어진다”

독일의 대표 문학가 마틴 발저가 저서 ‘어느 책 읽는 사람의 이력서’에서 한 말이다. 다양한 배경지식과 상황에 놓인 독자가 한 권의 책을 만나 꿈꾸는 것 그 자체는 ‘창조적 행위’와 같다는 의미다.

우리도 저마다 딛고 선 ‘역사’를 통해 꿈꿀 수 있을까. 박상익 우석대 교수(역사교육과 서양사)는 “역사와 단절된 현재는 불가능하다”며 손을 저었다.

박 교수는 오래 전부터 다양한 매체를 통해 국가차원의 ‘번역청 설립’을 주장해왔다.

국가적으로 ‘영어 몰입교육’에 손발 걷어부치고, 대학에서는 영어강의가 날로 늘고 있는 요즘, 그의 주장은 낮설다. 외국 서적 번역을 통한 한글 기반의 텍스트 구축에 대한 필요성에 목소리를 한껏 높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번역을 통해 세계의 지식을 자국어로 습득함으로써 단절됐던 우리의 역사를 바로 잇고 비로소 정체성도 찾을 수 있다는 것.

그는 번역을 거치지 않으면 우리의 역사도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영어권 독자들은 500년 전의 셰익스피어 희곡과 400년 전의 존 밀턴의 작품을 지금도 읽을 수 있지만 우리는 불과 100여년 전의 우리 문헌을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 조차 읽을 수 없습니다."

조선시대까지 한문을, 일제 강점기는 일본어를, 이후 비로소 한글을 사용하게 됐으므로 한글 기반 인문학의 관점에서 100년도 못된 신생국임을 자인하고 선조들의 기록물부터 번역을 마쳐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야 수천 년의 우리 역사가 온전히 한글 콘텐츠에 편입될 수 있고, 우리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 번역은 역사적 연속성의 복원작업인 셈이다.

“교수의 승진ㆍ재임용심사에서 일부 대학에서는 번역서에 대한 내규를 만들어 저서로 인정해 주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논문 위주로 점수를 인정해주고 있습니다. 교수평가 시스템 상 번역서는 또 하나의 저서로서 인정받고 있지 못한 것이지요. 이 일이 그래서 참 힘든 겁니다."

그는 시스템 상의 눈에 보이는 문제를 그저 보고만 있는 지식인들의 태도가 더 문제라고 꼬집었다. 박 교수는 지식인이라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틀’에서 깨어나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키는 것만 하는 ‘지식 기능공’이 지식인이 아니지 않은가. 시스템에 문제가 있으면 이의를 제기하고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지식인의 진정한 책무라는 것이다. 지식인의 침묵은 역사의 연속성에도 역사발전에도 저해된다고 그는 말한다.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유수의 대학에서는 ‘번역서’를 석박사 학위논문으로서도 인정해주고 있다. 번역서에 대한 대우가 우리와는 분명히 다르다. 

“동양학의 경우 중국, 일본, 한국학 등 전공자가 전공 관련 서적을 유학 국가의 언어로 ‘연구번역’하면 연구결과로서 인정해 주고 있어요. 세계에 흩어져 있는 고급지식을 자국의 언어로 흡수하려는 목적으로 세계 지식 인프라 구축과 연결돼 미래 국가 경쟁력 향상에도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번역작업은 시장논리로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사회 인프라를 구축하듯 번역도 국가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번역청을 설립해 정부 주도의 번역 사업을 벌여 한글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확충시켜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영어를 못하는 일본 쿄토산업대의 마스카와 도시히데(益川敏英)교수가 지난 2008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일본은 자국어로 해당 분야의 지식 인프라가 구축돼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 차이지요.”

그는 더 이상 일본식 한자번역에 무임승차 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우리글로 세계를 인식하려는 시도 없이는 우리의 정체성도 역사의 연속성도 지킬 수 없다는 이야기다. 한글 텍스트 작업은 불과 70여년 밖에 되지 않아 한글 콘텐츠 확충 사업은 인문학 차원의 ‘건국운동’이며 진정한 독립 국가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그는 재차 강조했다.

다들 외국어를 익혀 밖으로 밖으로 나가라고 할 때, 그는 우리 안의 정체성을 건드려 일어나라고 한다. 한글로 세계를 배울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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