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행복(한양대 중국학과 교수/본지 논설위원)

도시마다 지역마다 인문학 강좌나 관련 사업들이 활발히 진행되고, 정부기관이나 기업들 역시 열심히 인문학 강좌를 초치하고 있다. 인문학 분야에 종사하는 한 사람으로서 당연히 반겨야 할 일이지만, 가끔은 우려스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들의 지적 호기심 충족이 주된 성과일 것으로 보이는 강좌들이 어렵지 않게 발견되는 등의 상황이, 인문학이 지금의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고 있는지를 회의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 다수가 귀를 솔깃해 할 역사사건을 골라 진행하는 TV 쇼프로그램까지 만들어진 것을 보면, 인문학이 제법 ‘소비’되고 있고 또한 판로가 커져가는 모양이니, 무엇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시민들은 왜 인문학을 찾는 것인가? 정부기관이나 기업은 왜 인문학 강좌를 여는 것인가? 사람들이 인문학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갈 교양의 함양이 아닐까 싶다. 인문학은 본래 인간 자체와 인간이 축적해 온 문화의 정수를 주된 탐구영역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문학은 본원적으로 인간존중과 존엄스러운 삶을 추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더해 인문학을 통해 삶에 지친 영혼을 위로받고 삶의 용기를 다잡을 수도 있을 것이며, 인류문화에 대한 소양과 인문적 상상력을 키움으로써 산업발전에 기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문학 강좌들을 찾아다니며 삶의 무료함을 달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인문학이 삶에 지친 현대인에게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것인데, 그렇다 하더라도 전가의 보도일 수는 없다. 피폐해진 영혼들이 인문학에게 위로받고 또한 ‘배려’의 미덕을 배우지만, 혹독한 경제체제 속에서 빚어진 좌절감이나 상실감이나 열패감을 해소하려면 제도의 개편과 같은 사회과학적 접근이 인문학적 ‘치유’보다 선행돼야 할 수도 있다. 인문학적 상상이 가미된 상품들이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고, 인문적 상상력이 미래 창조경제의 중요한 원천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또 현재 각광받고 있는 각 종 문화산업은 인문학의 영역 내에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인문학은 본질상 산업 영역에 주된 관심을 두는 학문이기가 어렵다.

인문학이 더 이상 쓸모없는 공부로 치부되고 있지 않고 세상은 전에 없던 높은 기대를 인문학에게 걸고 있지만 그렇다하더라도 객관적인 분석과 자기비판을 유지하면서 착실히 위상을 다져가야 한다. 지난 10년간 OECD 회원국의 자살률이 평균 20% 이상 감소했는데도 한국에서는 외려 자살률이 2배로 늘었다면, 인구 10만명당 자살이 OECD 평균은 12명인데 한국은 29명이라면, 한국의 인문학은 어떻게 ‘치유’할 것인지와 더불어 한국 사회의 소외를 해소할 인문학적 대안의 제시를 위해 절치부심해야지 않겠는가? 인문학이 인간과 삶을 통찰하는 지혜의 함양과 가장 밀접한 학문임에 분명하고 산업계도 인문적 소양과 상상력에 대해 공전의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도 대학이 배출한 인문학도의 채용을 꺼린다면 인문학계는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를 고심해야지 않겠는가?

세상의 기대를 저버린다면 ‘인문학 열풍’ 운운하는 분위기가 머지않아 사라질 수도 있다. 인문학계가 광범하고 진지한 토론과 통렬한 자기진단을 통해 진로를 찾아가고, 그리하여 인문학 부흥을 이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인문학은 인간이 태초부터 발전시켜 온 지적 영역이다. 인문학을 무용한 학문으로 치부했던 산업사회의 왜곡된 인식이 사라졌으니, 이제는 인문학 스스로 과대포장을 경계하면서 본령을 지키는 가운데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야 한다.

쓸모 있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벌목꾼들의 도끼를 피해 무성한 거목으로 자라게 된 나무와, 잘 울어대지 못하기 때문에 일찌감치 죽임을 당한 거위가 있었는데, 이를 본 장자가 말했다. “쓸모있음과 쓸모없음의 사이를 택하련다(將處乎材與不材之間)” ≪장자(莊子)≫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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