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5월호 『참여사회』(참여연대 발행)에는 이경희씨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이경희씨는 5·18 때 간호사복을 입고 광주시내를 돌며 헌혈방송을 했던 목포공전 학생이었다.

“무고한 시민이 계엄군에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광주시민 여러분 피가 +부족합니다. 헌혈을 해 주십시오”

처음에는 스스로 헌혈하러 부상자들이 있는 병원을 찾아갔다가 감기 +때문에 헌혈을 못하게 되자 그 대신 지프차에 올라타고 이렇게 헌혈방송을 시작했다고 한다.

5월은 신록의 계절, 아카시아 향기가 바람에 실려오는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다. 그런데 광주의 5월은 이렇게 핏빛의 계절, 피비린내가 바람에 +실려 온 장안에 퍼지는 계절이 된 것이다. 이런 80년 5월의 순간순간 중 그래도 그곳 시민들이 다른 어느 때보다도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27일 새벽, 아직 어둠이 가시기 전에 계엄군은 시내로 밀려 들어와서 마침내 도청을 공격한다.

이때 한편에서는 이경희씨의 애절한 목소리가 어둠을 타고 퍼져 나간다. +그때 시민들 대다수는 도청의 시민군을 나와서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그녀의 애절한 목소리를 듣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민들은 거의 아무도 그 순간에 그 호소를 들으면서도 뛰쳐 나가지는 못한 것 같다.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으로 땀을 흘리며 기도를 하다가 로마군사들에게 끌려 가던 날 밤 새벽닭이 울 때까지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의 심정이 그런 것이었을까?

그런데 그때 구원을 호소하는 이경희씨의 애절한 목소리를 들은 것은 결코광주시민만이 아니었다. 그 소리는 그때 온 나라에 퍼지고 있었다. 계엄군의 광주 작전을 묵인해 주고 있었던 미국 백악관 사람들도 그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아니 그들은 논외로 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서울이나 부산에 있었다고 해서 그 소리를 못 들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못 들었다면 귀가 아닌 양심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교수들도 그랬었다. 이미 18일부터 구원을 호소하는 이경희씨의 소리가 울려오고 있었지만 우리는 양심의 귀를 막고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대다수의 교수들은 지금까지 무사하게 세상에 살아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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