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민립대학이 '사유화' 위기 거쳐 학내 민주화 이뤄내기까지

『우리나라 근대 고등교육의 역사는 1945년 8.15 광복 이후 시작돼 올해로 70년이 된다. 100년이 채 되지 않는, 서양에 비해 초라한 역사라고 단정 지을 일이 아니다. 우리 대학의 70년은 수많은 동량을 배출해 압축 경제성장을 견인하고, 국가의 첨단산업을 이끄는 비전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이룩한 놀라운 역사이기도 하다. 학령인구의 감소에 따른 대학구조개혁으로 인해 대학인의 자부심이 날로 추락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대학신문은 대학 70년 역사를 통해 ‘한국대학의 유산’을 선정함으로써 우리 대학이 세계로 미래로 나아가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한국대학의 유산'은 역사적인 인물과 사건, 정책, 장소, 유적 등을 총망라한다. -편집자 주』

 

▲ 설립동지회장과 재정부장을 맡은 박철웅씨가 총장에 취임하며, 폭행시비부터 불공정한 인사, 부정입학 등 의혹이 일어났다. 이에 조선대 학생들은 '박철웅 총장 퇴진'을 요구하며 혈서로 플랭카드를 만들었다.
 
[한국대학신문 신나리 기자] 조선대 학내 민주화를 일궈낸 1.8항쟁은 1987~1988년 대학 민주화, 한국 사회의 민주화 역사와 결을 같이한다. 1987년 5월 1일 군부독재타도를 목표로 한 민주화운동과 맞물려 조선대에서는 학원민주화와 당시 박철웅 총장 반대를 외치는 투쟁이 본격화됐다. 동시에 1.8 항쟁은 학생 구성원의 요구나 주장에서 그치지 않고 지역민까지 함께 학내 민주화와 투쟁에 힘을 쏟은 사건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1988년 1월 8일. 조선대에 공권력이 투입되면서 113일의 장기농성이 막을 내렸다. 바리게이트를 치고 학내 건물에 올라 '학내 민주주의'를 외친 1월 8일은 대학 민주화의 출발로 새겨지고 있다. 1.8항쟁을 계기로 1988년 2월 4일 박철웅 총장 중심의 이사진 해임과 관선이사 선임 등 학내 민주화를 위한 여정이 시작됐다. 
 
주인 없는 학교. 교육이 중요하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지역민들이 쌈짓돈을 모아 건립한 최초의 민립대학인 조선대가 학내 민주화를 위해 벌인 투쟁은 한 대학 내의 민주화 구호가 아니었다. 대학이 온전히 교육기관으로서의 길을 가야한다는 경종이기도 하다. 
 
조선대 1.8항쟁으로 시작된 각 대학 민주화 길은 여전히 미완이라는 평가가 적지 않다. 현재 대학가의 풍경이 그런 평가를 뒷받침한다. 감신대에서는 대학을 사유화 하려 한다며 이사장의 퇴진을 요구하고 여학생(총여학생회장)이 종탑위에 올라 농성을 하는 일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직권남용, 사립학교법 위반, 업무상 횡령,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혐의 등 중앙대에게 특혜를 줬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청와대 전 수석에게 사전 구속영장이 청구된 것도 요며칠전의 일이다.
 
학교의 주인인 학내 구성원의 의견을 대학운영에 반영할 것을 요구하며 벌인 27년 전 조선대의 1.8항쟁을 통해 학내 민주화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은 우리 대학 역사에서 중요한 대목임에 틀림없다. 
 
주인 없는 학교, 모두가 주인인 학교 = 1919년 3.1운동 이후 민족지도자들이 다짐한 것 중 하나는 ‘교육’이었다. 조선의 독립만큼이나 조선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해서였다. 3.1운동 2년 후 1921년 11월. 이상재, 이승훈 등을 주축으로 ‘민립대학기성준비회’가 조직됐다. 하지만 대학 설립운동은 지속될 수 없었다. 일제가 이 운동을 민족운동으로 간주, 모금운동을 철저히 방해했기 때문이다. 결국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해방 이후에야 이어졌다. 
 
민중들의 강한 교육열은 대학 설립의 꿈을 이뤄냈다. 콩 한말, 깨 한 되, 쌀가마로부터 부호의 거금에 이르기까지 정성과 성원이 쌓였다. 설립동지회원 7만 2000명의 활동 영역은 충청도와 제주도에까지 이르렀다. 교육에 대한 의지와 '돈이 없고 가난해도 조선대학만 잘 세우고 회원이 되면 누구라도 대학에 갈 수 있다'는 설득에 머슴살이 촌부에서 지주부호까지 조선대학설립동지회의 회원이 됐다. 
 
결국 이들의 성원으로 1947년 당시 문교부(현 교육부)에 대학설립 인가를 신청했다. 당시 문교부에 7만 2000명의 회원 이름으로 대학설립을 신청하던 날, 신청서류가 너무 많아 학생대표 7명이 미군 트럭에 서류를 싣고 갈 정도였다. 대학 설립에 대한 열망은 그렇게 무겁고 컸다. 조선대 설립은 일제강점기 식민지배하에서 줄기차게 추진되어 온 민립대학설립운동에 맥을 두고, 민족해방과 독립 국가 건설이라는 민족적 염원에 뿌리를 두며 일궈낸 성과였다. 
▲ 1988년 1월 8일 조선대 본관에 오른 학생들은 '조선대의 민주주의'와 '박철웅 총장 퇴진'을 요구했다. 1500명의 사복경찰과 전투경찰은 조선대를 둘러싸고 이들을 저지했다.
 
자유가 사라진 캠퍼스에서는 무슨 일이...= 1988년 1월 8일. 조선대 정문, 후문, 조선대병원입구에서 공대후문까지. 1500명의 경찰이 학교에 들어섰다. 사복경찰들은 병원과 치대건물, 자연대 등을 둘러싸고 유리창을 파괴했다. 전투경찰 역시 최루탄을 쏘아댔다. 
 
최초의 민립대학은 설립됐지만, 공공성은 오래 가지 못했다. 설립 당시 설립동지회장과 재정부장을 맡았던 박철웅 씨와 그 일가는 박 씨가 총장으로 취임하며 ‘독단적인 학교 운영’으로 대학을 ‘박철웅의 철옹성’으로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민주조선대 수호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가 펴낸 ‘민주조선대 지키기’를 살펴보면, 1987년부터 조선대에서는 학내 민주화가 실종됐다. 교비 전용·불공정한 인사·부정입학 의혹 등 비리가 쌓여갔다.당시 총장이던 박철웅씨가 조선대 병원장에게 손찌검을 하고 깡패가 학생처 직원으로 채용된 일들이 발생했다. 
 
▲ 1월 8일 경찰과 학생들이 대치하는 가운데, 조선대 본관 일부가 불타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학생들 중 일부는 바리게이트를 치고 본관에 올라 경찰에 대항했다.
재단 쪽은 박 총장이 병원장의 뒷덜미만 잡았을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구성원의 분노는 쉽게 사그러들지지 않았다. 당시 폭행시비가 의과대를 중심으로 학원 민주화 투쟁에 불을 지폈고, 학생들은 장기 농성에 들어갔다. 의대에서 시작한 ‘조선대 민주화’에 대한 요구는 학내에서 일어나는 작은 소동에 그치지 않았다. 학부모까지 나섰고, 시민들도 가세하면서 사태가 확산됐다. 이렇게 시작된 농성이 1988년 1월 8일까지 113일간 이어졌다. 
 
1월 8일 경찰의 학내 강제진압과정에서 옥상에서 투신하며 조선대 1.8항쟁의 상징적인 인물이 된 이광호 씨는 “조선대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을 교직원이 데려가 폭행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말했다. 이 씨는 현재 조선대의 개방이사다. 
 
결국 당시 문교부는 1987년 11월 종합감사를 벌였다. 감사 결과 문교부는 부정 편입학·교원 탄압 등의 이유로 1988년 2월 4일 박철웅 총장뿐 아니라 당시 이사였던 정애리시·박성섭씨를 해임했다. 
 
‘완성’ 없는 학내 민주화는 아직도 진행 중= 1.8항쟁을 겪은 조선대는 ‘학내 민주화’를 위한 시스템을 마련했다. ‘합의정신’이 그것이다. 현재 조선대는 교수평의회·총동창회·직원노조·학생회 등으로 이루어진 대학자치운영협의회(대자협)가 운영되고 있다. 
 
대자협은 총장 선출방식부터 이사회 구성, 기타 학내 문제를 논의하는 기구다. ‘신뢰와 양보’라는 ‘합의정신’을 이념으로 합의가 될 때까지 문제를 논의한다. 민주화의 과정이 혹독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교훈을 두고두고 되새기려는 노력이다. 
 
박대환 조선대 민주화운동연구원장은 “대자협은 공동의 지혜를 모으기 위해 만들어졌다. 학내 민주화라는 것이 한번 잃게 되면 다시 찾기 어려운 과정이라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은 뒤 구성된 협의회”라며 “지금은 각 대학마다 대학평의원회가 구성돼 학내 문제를 논의하지만 모태가 된 것은 1988년 만들어진 대자협”이라고 설명했다. 
▲ 1.8항쟁의 기억은 조선대 곳곳에 남아있다. 조선대는 1.8항쟁 기념비를 캠퍼스에 마련해 그날을 기억한다. 1.8항쟁은 올해로 27년을 맞이한다. 조선대는 매년 1.8항쟁의 정신을 기리는 기념식을 진행한다.
 
대학 내에서 발생하는 일을 학내 구성원과 논의, 합의해서 만들어 가는 여정은 간단하지 않다. 의견의 조율은 쉽지 않고 끊임없이 이견들이 발생한다. 민주주의가 다양한 의견의 충돌로 소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광호 조선대 이사는 “1.8항쟁은 대학이라는 ‘공공재’를 ‘사유화’하려는 이들 때문에 시작됐다. 학생과 교직원 등 학내 구성원을 존중하고 민주적 의사소통을 중요시하는 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다”며 “조선대의 학내 민주화가 완성됐다고 할 수 없다. 애초에 완성이라는 것이 없다. 대학의 주인이 누구인지 대학의 가치를 기억하고 되새기는 과정에서만 학내 민주화는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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