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분오열 해방정국서 백범과 통일정부 노선...단정 수립 후 정치와 거리두기

분파 난립하고 친일파 득세하던 유교 통합·숙정하고 성균관대 재설립 주도
대통령 하야, 자유당 해체, 부정선거 무효 등 당시 이승만정부 비판 거침없어

『우리나라 근대 고등교육의 역사는 1945년 8.15 광복 이후 시작돼 올해로 70년이 된다. 100년이 채 되지 않는, 서양에 비해 초라한 역사라고 단정지을 일이 아니다. 우리 대학의 70년은 수많은 동량을 배출해 압축 경제성장을 견인하고, 국가의 첨단산업을 이끄는 비전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이룩한 놀라운 역사이기도 하다. 학령인구의 감소에 따른 대학구조개혁으로 인해 대학인의 자부심이 날로 추락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대학신문은 대학 70년 역사를 통해 ‘한국대학의 유산’을 선정함으로써 우리 대학이 세계로 미래로 나아가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한국대학의 유산'은 역사적인 인물과 사건, 정책, 장소, 유적 등을 총망라한다. -편집자 주』

[한국대학신문 이우희 기자] 진정한 교육자는 누구나 얼마간 이상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이상을 희구(希求)하기에 뜨거운 가슴을 가질 수 있다. 뜨거운 스승의 가슴은 제자들의 가슴을 울린다. 심산(心山) 김창숙(1879~1962)은 백범 김구와 함께 해방정국의 이상주의자로 불린다. 유림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로 일제강점기를 관통한 뒤, 해방을 맞은 심산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끝까지 반대한다. 당시 북에는 소련군이 남에는 미군이 주둔한 현실에서 통일정부는 헛된 이상에 가까웠다. 당시의 혼탁한 정치적 상황에서 심산과 백범은 순진했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에 독재자 앞에서도 추상 같이 매서울 수 있었다. 성균관대의 재설립을 주도하고 초대총장을 지낸 교육자 심산의 면모는, 총선이 다가오면 정치권을 기웃대며 오매불망 여야의 '부름'을 학수고대하는 폴리페서들과 지방선거 철이면 교육감 나가겠다고 임기 중 학교와 구성원을 저버리는 작금의 대학 총장들과는 격조부터 달랐다.

▲ 유림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인 心山 김창숙(사신 오른쪽)은 백범 김구와 함께 해방정국의 이상주의자로 불린다. 두 사람은 해방정국에서 신탁통치와 단독정부 수립을 끝까지 반대한다. ⓒ시대의창 '심산 김창숙 평전' 제공

■ 부패·독재의 길로 접어든 이승만정부의 눈엣가시 총장 = #1952년 여름 부산 남포동 경양식당 국제구락부에서는 심산 김창숙과 이시영, 김성수, 조병옥, 서상일, 장면 등 81명의 인사가 모여 엄숙한 표정으로 반독재와 헌법수호를 외치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상당수의 괴한들이 벽돌과 각목 따위를 들고 난입했다. 일제강점기에 옥고를 치른 이후 하반신을 못 쓰는 일흔네 살의 김창숙은 의장석에 앉아 도망도 못하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훗날 '국제구락부사건'으로 기록된 이 사건은 독재와 부패의 길로 들어선 이승만정부에 끝까지 맞선 김창숙의 항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이승만정부는 제2대 대통령선거에 앞서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을 들고 나왔다. 간접선거로는 재집권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헌법을 바꿔서라도 집권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심산과 일부 인사들이 강력히 반대하고 나서자 정치깡패를 동원했다.

이 사건으로 옥고까지 치렀지만 심산의 독재 비판은 끊이지 않았다. 이승만이 온갖 선거부정과 관권·협작 선거로 3선 고지에 올랐다. 심산은 '대통령 3선 취임에 한마디 올린다'는 성명을 통해 간신배의 해임과 자유당 해체, 재선거 등을 요구했다. 심산은 "이제 전국의 민심이 정부로부터 이탈했으니, 이탈한 민심을 회수하려거든 간신배들을 해임하고 이번 부정선거를 무효로 선언해 재선거를 실시해야한다"고 강조했다.

▲ 공판장으로 가는 김창숙 ⓒ시대의창 '심산 김창숙 평전' 제공

■ "내 배에 총을 쏴라" 북한군 협박에도 '꼿꼿' = 김창숙이 이승만과 대립했던 원인은 좀더 연원이 깊다. 정권이 독재로 치닫기 전부터 심산과 우남(이승만)은 노선이 달랐다.

연구가들은 심산의 생애를 다섯 시기로 구분한다. 제1기(1905~1910)는 구한말 망국을 앞둔 때로 심산의 초년기다. 이 시기에 심산은 대한협회에 가담해 계급 타파를 부르짖으며 신교육을 위해 성명학교를 세웠다. 제2기(1910~1919)는 경술국치를 당하고 낙심해 오히려 집에 머물며 유학에 정진하던 시기다.

독립운동가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던 것은 제3기(1919~1927)부터다. 대표적으로 3.1운동 이후 유림을 규합해 130여 인이 연명한 '파리장서'를 들고 파리강화회의를 향해 출국한 일이 있다. 내몽고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모금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나석주 의사의 의거도 심산 주동으로 이뤄졌다. 이후 일제에 붙잡혀 옥고를 치르고 갖은 고문을 당하다가 불구의 몸이 된 시기가 제4기(1927~1945)다.

제5기(1945~1962)가 바로 해방정국부터 타계까지다. 해방이 되자 일찍 소련이 주둔해 공산주의화가 이뤄진 북한과 달리 남한은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심산은 백범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이미 준정부가 자리잡은 북한을 제외한 남한만의 단독정부 구성을 주장한 이승만과는 이때부터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김일성의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은 것은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북한이 점령한 서울에서 심산은 끝까지 지지선언을 거부하고도 목숨을 부지한 거의 유일한 사회지도자급 인사였다.

하루는 수도 인민위원장이 무장한 병사를 데리고 심산을 찾아와 지지선언을 종용했다. 심산이 동요하지 않자 미리 작성해온 원고에 서명할 것을 협박했다. 심산은 "동족의 생명을 앗아가는 이 포악무도한 놈들아, 내 배에 총을 쏴라. 나는 김일성을 지지할 수 없다"고 일갈했다.

▲ 성균관대 총장 시절 ⓒ시대의창 '심산 김창숙 평전' 제공

■ 분열하는 정치에 거리두고 교육자이자 큰 어른으로 남아 = 오직 통일정부 수립만을 바랐던 심산은 정치적으로는 이상주의자에 머물렀지만 유교 지도자와 교육자로서는 현실적으로 많은 일들을 성취했다.

심산은 오늘날의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지킨 주인공이다. 해방정국에서 유교는 여러 단체가 난립하고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등 극심한 혼란속에 있었다. 심산은 유림을 결속해 유도회를 조직하고 1946년 전국 유림대회를 개최해 유도회 총 본부 위원장에 선출됐다.

분열된 유림을 하나로 규합해 유도회를 조직한 것은 유림의 대학을 설립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성균관대의 설립이다. 심산은 "전국 유교인이 하나로 뜻을 모을수 있느냐 없느냐는 성균관대학이 서느나 못 서느냐의 척도이다. 기독교나 불교인들은 진작 합심해서 대학을 설립했다. 저들에게 부끄럽지 않은가"라고 호소했다. 심산의 노력으로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은 1946년 9월 25일 문교부로부터 정식 설립인가를 받는다.

초대 학장으로 그는 전국에 흩어진 향교재단을 규합하고 재산을 기부받아 성균관대를 종합대학으로 키운다.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뒤 초대총장으로 취임했지만 3년도 채 안돼 이승만정부의 탄압으로 1956년 2월 총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독재에 반대해 '이승만 대통령 하야 경고문'을 발표하고 '국제구락부'를 주도하는 등 심산은 정권의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대통령에 출마하려는 정치인들이 줄지어 인사를 오고, 5.16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가 가장 먼저 찾은 이도 병석에 누운 심산이었다. 해방정국 이후 평생 정치를 멀리했지만 정치인들이 앞다퉈 지지를 갈구한 큰 교육자요, 어른이었다.

비열한 술수와 분파주의가 판치는 혼탁한 당시의 정치상황을 묘사한 심산의 시 ‘당인탄(黨人歎)’은 여야 할 것 없이 친박과 비박, 친노와 비노 등 끊임없이 세포분열하는 오늘날의 정치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내들었노라, 이조 중엽에/동·서 두 당파 있었단 말/그 뒤 당론이 더욱 갈리어/둘이 나뉘고 드디어 넷 되었네...(중략)...아, 이 세상 모든 黨人/그대들 목적한 바 권세와 이익일 뿐/나는 원래 당이 없으니...(중략)...나는 나의 지키는 것 따로 있으니/黨人들이여, 나를 원망치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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