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 "자칫 새로운 획일화로 변질될 수도…장기 전략 고민해야”

※글 싣는 순서
<상> 융·복합 시대, 대학의 현주소는
<하> 학문 융·복합 성패, 전략이 관건

대학 학문 융·복합은 시작단계… 물리적 통합 수준에 불과

[한국대학신문 송보배 기자] 1980년 이후 지속돼 온 지식융합 논의가 거세지고 있다. 미풍에서 시작한 융·복합 바람은 현재 거대한 태풍으로 몰아치고 있다. 전문가들은 학문 융·복합이 거스를 수 없는 미래 흐름이라 전망하면서도 현재 대학의 융·복합 시도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간판 합치기 식의 물리적 결합에 그쳐 화학적인 결합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융·복합 시도의 배경이 대학의 발전전략 보다는 타의성에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학문 융·복합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다각적인 전략과 지원이 필요하다는 진단도 나온다.

대학들은 최근까지 적극적으로 융·복합 열풍에 뛰어들고 있다. 고려대는 최근 최첨단 융복합의료센터 설립을 가시화했고 성균관대도 융합학문인 글로벌바이오메디컬엔지니어링(BME·Biomedical Engineering)학과를 지난해 신설했다. 한국외대도 LD(Language&Diplomacy)학부, LT(Language&Trade)학부 개설에 이어 바이오메디컬공학부와 GBT(Global Business & Technolongy)학부 등 융·복합 학과 신설에 나서고 있다. 이공계 분야 특성화대학인 디지스트(DGIST)는 대학원 과정을 아예 융복합 학제로 운영하고 있다.

융·복합이 대학의 화두로 떠오른 데에는 근본적으로는 시대 변화가 배경이 되고 있다. 근대 이후 학문은 분업화, 전문화 되면서 과학문명과 학문의 깊이 있는 발전을 이뤘으나, 급변하는 정보화 사회 앞에서 그 한계를 맞이했다는 지적이다.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발생하는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공 단위 단일 학문만으로 대응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학문의 패러다임은 기존 전공 중심에서 융·복합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 나온다.

미래학자인 박영숙 유엔미래포럼대표는 “학문은 융·복합으로 갈 수밖에 없다”며 “미래에는 인문계, 자연계, 무슨 학과 이렇게 갈라지는 게 아니고 프로젝트 단위로 가게 된다. 예를 들어 ‘기후 변화’ ‘물 부족 현상’‘과 같은 문제해결 단위로 연구를 하게 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학자들이 모여 아이디어를 나누는 식”이라 말했다.

하지만 현재 대학들이 시도하고 있는 융·복합 시도가 진정한 의미의 융·복합인가에 대한 전문가 진단은 다소 부정적이다. 학문 정체성이나 지속성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는 진단이다.

박승억 숙명여대 교수(교양교육원)는 “대학이 어떤 콘텐츠를 갖고 전공을 운영해야 하고 실제 행정적으로 어떤 서포트가 필요한지 충분한 고민이 없다”며 “대학도 계속 모색하는 단계다보니 학생들은 내가 이런 전공을 해도 없어지는 게 아닌가하는 불안을 안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대학들이 야심차게 학과를 신설해놓고 이내 폐과하는 사례는 빈번하다. 단국대 천안캠퍼스는 2014년 처음 신입생을 뽑은 생명의료정보학과를 올해 폐과 결정했으며, 충북대도 지난 2012년 신설한 디지털정보융합과를 2년 만에 폐과했다.

지난해 ‘학문 융·복합 현상에 대한 교육학적 고찰’ 논문을 발표한 정철민 김포대학 교수(유아교육과)는 대학 구성원들의 수용성을 고려하지 않은 융·복합은 성공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대학의 융·복합 시도는 그 자체로 의미 있는 도전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교수와 학생 입장에서 보면 문제가 다르다”며 “융·복합을 할 수 있는 교수 숫자 자체가 워낙 적고 학생들이 융·복합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도 미비하다. 교육을 수용하는 학생과 교수에 대한 연구지원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융·복합이 아닌 단순 나열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이현청 한양대 석좌교수도 현재 대학들의 융·복합 시도들이 단순 결합에 그친다고 봤다. 이 교수는 “대학에서 융·복합을 시도하는 것이 초창기다보니 현재는 융·복합을 시늉내는 정도다”며 “융·복합 학부 시도는 많지만 그 자체를 융·복합이라 볼 수는 없다. 기본적으로 지식정보화사회가 바탕이 돼야 하고 이에 특정학문을 보완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어야 하는데 현재로선 교차 강의 정도에 그치고 있다”고 평했다.

이런 시행착오의 근본 원인은 융·복합 시도가 타의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란 분석도 나온다. 대학 내부의 필요가 아닌 학령인구 감소로 인한 구조조정 바람과 융·복합을 유도하는 정부의 정책기조 때문에 융·복합을 시도하다보니충분한 고민과 전략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박승억 교수는 “융·복합이 필요하다는 대학 내부의 인식을 바탕으로 자발적으로 추진되기 보다는 학령인구감소와 관련 대학이 생존하기 위해 구조조정을 시작하고 교육부도 대학에 산업수요에 맞추고 학문 융·복합을 하라고 요구하면서 시작됐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외부 압력에 의해 촉발된 융·복합은 충분한 고민 없이 졸속적으로 이뤄질 가능성이 많다”고 지적했다.

학문 융·복합 추세가 단순한 유행에 그칠 경우 ‘유행에 의한 획일화’가 학문 생태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란 우려도 상당하다.

이현청 교수는 “융·복합에는 전략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특정 취향이 정착되면 거기에 다 몰리는 경향이 크다. 트렌드에 의한 새로운 획일화가 일어난다. 이것은 결국 같이 죽자는 것”이라며 추세에 휩쓸린 무분별한 융·복합 시도에 우려를 나타냈다.

그렇다면 대학의 융·복합 전략이 성공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장기적 관점에서 △학문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전략 △학생과 교수의 수용성을 높이기 위한 시스템 △교육당국의 연구지원이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정철민 교수는 학문 융·복합이 교육주체의 수용성을 위한 연구지원과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는 “현재 융·복합을 선도적으로 연구하겠다는 학생을 찾기 어렵다는 점에 비춰보면 융·복합이 교육주체와 괴리된 측면이 있다”며 “융·복합 연구를 할 수 있는 연구풍토가 조성돼야 한다. 인문학자가 과학에, 또 과학자가 인문학에 참여할 수 있는 풍토가 마련돼야 하고 이를 위한 연구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학문 정체성과 전략을 위한 고민도 수반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승억 교수는 “융·복합은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며 “교육 분야에서 커리큘럼이 개발되려면 충분한 연구가 뒷받침 돼야 한다. 새로운 전공이 생겨나는데 아이덴티티가 뭐냐 이건 답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교육부도 실질적으로 융·복합을 위한 정책적 지원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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