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단 한 명도 내 손으로 죽이지도, 죽이라고 명령하지도 않았으며 시키는 것을 그대로 실천한 관료였다.…그 열차를 만든 건 지시 받은 업무를 잘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그 열차 덕분에 우리 조직은 시간 낭비 없이 일을 잘 할 수 있었다.”

1961년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열린 나치 전범 재판 법정에 선 아돌프 아이히만의 진술 내용이다. 그는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을 실은 전차를 홀로코스트 수용소에 보내는 일을 했지만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일관했다.

꼭 데자뷔를 보는 것 같지 않은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핵심에 있는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은 미르·K스포츠 재단 설립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이 시켜서 한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수첩에는 774억 원 기금 모금 지시, 최순실 단골 성형외과 지원, 민간기업 임원으로 특정인 인사 등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단다. 놀랍게도 순종적인 답을 늘어놓은 안 수석은 미국 유명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딴 대학 교수 출신이다.

지성인들의 공동체 대학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최순실의 딸 정유라에게 입학과 학점 특혜를 준 이들도 역시 교수와 교수 출신 지식인들이었다. 교육부 감사 결과에 따르면 무려 18명이나 이번 특혜에 연루돼 징계부터 수사까지 받게 됐다. 그런데도 ‘금메달 가져온 학생을 뽑으라’고 한 남궁곤 전 입학처장은 총장이 시켰다고, 최경희 전 총장은 그런 적 없다고 버틴다는 후문이다.

비선실세 의혹에 연루된 지식인들은 한두 명이 아니며, 아직 다 드러나지도 않았다. 누구보다 많이 배우고 공부해 사회의 중책을 맡게 된 그들의 입에서 나온 발언들은 하나같이 부역자의 악취를 풍긴다.

독일 출신 유대인인 미국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프린스턴대 교수는 악독하기는커녕 순종적이고 따분한 답을 늘어놓는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본 뒤 ‘악의 평범성’ 개념을 제시했다.

아렌트 교수는 그의 보고서 겸 저서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그는 아주 근면한 인간이며, 이런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유죄인 명백한 이유는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의 무능. 말하기의 무능. 행동의 무능.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고 말했다.

지금도 비선실세 국정농단에 연루된 지식인들이 폭로되고 있으며 침묵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국정농단이 아무 문제가 아니라고 여전히 정권을 변호하는 정치인들은 또 어떤가. 이토록 정권에 순종적인 지식인이야말로 지금껏 어렵게 세워온 원칙을 우습게 만들고, 비인간성을 조장해온 ‘평범한 악’으로 규정한다면 과한 것일까.

국정농단 정권에 바른말을 한 지식인이 유진룡 전 문화체육부장관과 일부 문화부 관료들 뿐이었다는 사실을 이 나라 지식인들은 아프게 받아들이고, 또 처절하게 반성해야 한다. 불의에 무조건적인 복종을 하는 것은 국민이 주인인 민주주의 국가에서 부역이자 반역이다.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일보 진전하느냐 주저앉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끊임없이 사유하고 고발해야 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권력을 감시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최종 과제라 하겠다. 양심과 정의를 택하는 '불온한' 지식인들의 결단과 행동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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