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콘텐츠진흥원은 국산 애니메이션 본편 지원 사업 등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한국형 ‘너의 이름은.’ 제작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사업내용만 보면 국산 애니메이션시장의 콘텐츠 개발을 지원한다는 내용으로 무리가 없다. 문제는 ‘한국형’이라는 형용사였다. 비리의 온상으로 드러난 ‘한국형 전투기’를 포함해 정부가 ‘한국형’이라고 홍보한 거의 모든 사업은 졸속으로 추진됐거나 외국의 콘텐츠를 베끼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먼 일도 아니다. 지난해 구글이 개발한 인공지능(AI) 알파고가 이세돌 9단과 바둑 대국을 벌인 뒤 정부는 또 ‘한국형 알파고’를 만들겠다고 자신 있게 외쳤다. 그 이후 대기업을 끌어들여 지능정보기술연구원을 만드는 등 소란을 떨었지만 여전히 국내 AI기술은 갈 길이 멀다. 이처럼 ‘한국형’이라는 형용사는 어느새 졸속추진과 동의어가 됐다.

4차 산업시대를 대비한다면서 제각각 성과에 급급해 단기적이고 의례적이며 전시성 사업에 치중해 결국 예산만 낭비하는 꼴이 된다.

지금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는 전 세계 지도자, 기업인, 석학들이 모여 인류의 미래를 놓고 머리를 맞대고 있다. 다보스포럼에서 2016년 ‘4차 산업의 이해와 기본’을 제기했다면 2017년 올해는 ‘4차 산업의 가속화’를 주제로 어떻게 추진할 것인지 각 주체 간 소통과 책임의 리더십에 대해 폭넓게 의견을 나누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정부는 4차 산업혁명을 강조하고 대권주자들도 4차 산업혁명을 대비한 적임자라고 당당하게 소개할 때마다 기대보다 우려가 깊어진다. 4차 산업을 발빠르게 리드해야 할 정치, 경제, 기업의 주체들은 다보스포럼에 얼굴을 내밀기는커녕 최순실 게이트에 발이 묶여 꼼짝을 못하고 있으니 이러다 ‘한국형’ 4차 산업혁명이라는 민망한 말도 곧 회자되는 것이 아닐까.

정부는 이미 지난해 8월 4차 산업시대의 9대 국가전략 프로젝트라며 AI와 가상·증강현실(VR·AR), 자율주행차, 경량 소재, 스마트시티 등 5대 성장 동력 확보 전략과 정밀의료·신약·탄소자원화·미세먼지 등 4대 삶의 질 제고 전략을 제시했다.
평가는 엇갈린다. 국가가 나서서 집중 육성 전략을 끌고 나와 장기적 투자를 약속하고 있으니 긍정적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주로 또 정부가 나서려 하느냐는 비판이 드센 모습이다. 왜일까.

본지가 3주에 걸쳐 4차 산업혁명을 진단한 결과 학계에서는 정부의 전략은 ‘퍼스트 무버(First Mover)'보다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에 가깝다는 평가다. 한 교수는 “알파고가 인기를 끌자 정부는 AI를 연구해야 한다면서 이미 개발된 기술을 활용하는 방법만 관심을 두고 있다. 우리나라도 원천기술 연구에 꾸준히 투자해야 미래를 선점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한 교수는 “최근 4차 산업혁명이 정치적 슬로건이 됐다. 교육과 연구에 정치가 개입하면 무조건 망한다”며 탄식했다고 한다.

4차 산업은 그 미래를 선도하고 주도해야 할 연구자그룹과 학계와 기업에 맡겨라. 학문 간 기술 간 분업화를 통해 경계를 넘어야 한다. 그래야 창의가 싹튼다. 정치권과 정부가 할 일은 이들이 안정된 환경에서 연구하고 교육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현재의 대학과 연구계의 근본적인 혁신 없이 연구비를 쏟아 붓는다고 될 일도 아니다. 대학, 국책·민간 연구기관, 대기업, 혁신벤쳐등이 함께 뭉쳐야 한다. 서로 협력, 소통, 공유, 자율을 기본으로 책임을 지는 산·학·연의 새로운 리더십과 거버넌스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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