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자는 아침부터 밤까지 국민위해 봉사하는 삶
별명이 '조박사'… 상대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 특기

▲ 조봉래 목포대 사무국장

[한국대학신문 이재 기자] 불혹(不惑).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됐음을 뜻하는 말이다. 공자가 40세에 이르러 직접 체험한 것이라고 한다. 이어 50세가 되면 하늘의 명을 알았다는 지천명(知天命)을, 60세가 되면 귀가 순해져 생각하는 것이 원만해 어떤 일을 들으면 곧 이해가 된다는 이순(耳順)을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조봉래 목포대 사무국장(59‧사진)은 지난 15일 공직생활 만 40년에 접어들었다. 공직자로서 세상일에 미혹되지 않는 시간을 보낸 셈이다. 정년이 정해져 있는 공직자의 삶이라 하늘의 명을 아는 경지엔 이르지 못하겠지만 세상에 미혹되지 않는 공직자의 경험도 대단한 경지다. 특히 최근 사회가 팍팍해져 뜻을 세운다는 이립(而立)의 나이에도 공직에 입문하지 못한 젊은이들에게 조봉래 국장의 공직자로서의 삶을 들려줄 기회가 있어 20일 오후 목포대 사무국장실에서 그를 만났다.

인터뷰 약속시간에 문을 두드리고 들어간 조봉래 국장의 방에는 목포대 수학교육과에 재학 중인 학생이 마주앉아 있었다. 오는 11월 수학교사 임용고시를 치르는 이 학생은 시험을 앞두고 흔들리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조 국장을 만나고 있다고 고백했다. 학생의 뜨문뜨문한 질문에 조봉래 국장이 답했다. 친절하게 답한 조봉래 국장이 몸을 돌렸다.

“공직을 처음 시작할 때는 대부분 공직의 진정한 가치를 생각하고 입문하지 않지요.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가 공직의 문이 다른 기업에 비해 넓은 편이니 들어오게 됩니다. 공직자는 아침부터 밤까지 모든 생활을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삶입니다. 국민을 이해하고 국민의 여러 생활을 깨닫는 것이 과제이지요. 무언가 국민의 가려운 곳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것이 최고의 가치예요.”

조봉래 국장은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의식적으로 만났다. 시장에 가면 노점에서 직접 기른 마늘을 파는 행상도 만났다. 대학에 가면 가장 낮은 곳에서 대학을 가꾸는 미화원을 만났다. 지하에서 대학의 시설을 관리하는 시설현장직원들도 자주 만났다. 고위공직자로는 이례적으로 여전히 많은 사람을 만나고 산다. 그에겐 사람을 만나는 게 공직자의 삶이다.

“하루에 열 명 이상을 만나고 다닙니다. 그중 두셋은 항상 어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지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이들을 돕는 게 공직자의 삶 아니겠습니까. 대화를 통해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로잡거나 같이 새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죠. 그렇게 함께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볼 때 가장 보람찹니다.”

그만의 대화 요령도 있다. 눈높이 대화다. 누굴 만나건 자신을 먼저 내세우지 않는다. 상대방의 삶으로 비집고 들어가려 노력하는 게 조 국장의 대화다. 조 국장은 자신의 위치를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건 올바른 대화가 아니라고 단언했다. 감동시켜야 한다고 했다.

“사람들이 다 스스로 생각하고 바라는 바가 있지 않습니까? 누굴 만난다면 어떤 대화를 기대하고 만나지요. 그것을 빨리 깨닫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눈높이를 맞춰야죠. 제가 과거 어려운 삶을 살았다고 해서 그것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주입하고 다녀선 대화가 안 됩니다. 요새 학생들은 특히 그래요. 어려운 사회지 않습니까. 학생마다 원하는 바에 따라 눈높이를 맞춰 대화를 해야 합니다. 학생들의 삶을 공감해야 하고 마음속에 들어가야죠. 질책은 안 됩니다. 비록 처음에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으로 보여도 같이 그 길을 따라 대화를 하며 선회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게 멘토죠.”

이런 자세가 하루 이틀 형성된 것은 아니다. 답은 조 국장의 공직생활에 있었다. 조 국장은 교육부에서 30년, 국무총리실에서 약 10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두 군데 모두 다양한 사람을 만나야 하는 공보라인과 조직 내외의 기강을 다잡아야 하는 감사부서에서 근무했다. 한 손에는 엄정한 칼을 들고 있으면서 상대방을 만나 쉽게 대화하는 법을 체득해야 했다.

특히 그가 인사팀장 재임시 공직윤리지원관실을 조직하는데 실무를 맡았다가,  몇년 후 인사과장으로서 그 부서를 폐지하는 실무 책임자 역할을 한 것은 특별한 일화다. 2008년 이명박정부 초기 국무총리실 인사팀장 재임시 신설된 공직 감찰 부서인 공직윤리지원관실은 민간인 사찰이 사회문제로 이슈화됐다. 조봉래 국장은 2년 뒤 다른 과장 보직을 거쳐 다시 인사조직의 책임자인 인사과장으로 보임되자 그 부서를 조사해 책임자를 중징계 요구하고 새로운 현재의 공직복무관리관실로 만드는데 주역을 맡았다. 

2003년 참여정부 시절 교육부 기획감사담당관실(현재 사학감사담당관)을 신설, 추진해 지금의 감사관실 3과체제를 만드는데 공적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엄정한 일처리는 공직사회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실제 그는 감사 분야 최초의 박사학위 소지자다. 1호 행정감사학위를 받았다. 공직사회 내외에서 ‘조박사’로 통한다. 교육부에서도 감사업무를 10년 이상 하면서 교육현장의 환부를 도려내고 새살이 돋도록 하는 일을 했다.

그러면서도 부드러운 이미지가 있다. 엄정한 칼을 쥐고 있지만 대화를 좋아한다고 조 국장은 털어놨다.

“천성적으로 사람들과의 대화를 좋아합니다. 소통이죠. 대화 속에서 모르는 것을 알게 되고 나도 깨우치고 배우게 되고 상대방도 내 것을 품어서 서로 채워나가는 것이죠. 계층을 가리지 않고 대화를 해서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고, 특히 아주 따뜻한 스토리텔링을 통해 나도 즐거움을 느끼고 상대방도 즐거움을 느끼는 게 좋습니다. 따뜻한 세상을 살아가는 비결이라고 할까요.”

대화의 리더십은 곳곳에서 효과를 발휘했다. 서울과기대 사무국장으로 재직했던 2014~2016년 3년간 서울과기대와 지역민의 숙원사업이던 버스정류장 신설이나 청소미화노동자들의 처우개선 등 자랑거리가 많다. 그가 목포대 사무국장으로 전보되자 서울과기대 청소미화노동자들이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는 자랑스러운 안주거리다.

그렇다면 40년간 그가 미혹되지 않고 살아온 공직의 철학은 뭘까. 조 국장은 현장과 혁신, 감동을 꼽았다.

“모든 문제의 답은 현장에 있습니다. 실제로 경험했어요. 현장에 가보면 답이 다 있습니다. 정책가들의 정책도 현장에 자주 가서 시뮬레이션을 해봐야만 제대로 된 정책으로 정착될 수 있습니다. 둘째는 혁신이죠. 혁신은 특정한 이미지나 원칙이 아닙니다. 항상 새로운 생각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죠. 지속적 혁신노력의 결과로 교육부 감사관실 2과 체제를 지금의 감사관실 3과 형태로 확대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조 국장은 감동행정을 꼽는다. 감동은 결국 다시 대화다. “현장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들과 대화 속에서 방향을 얻고 멘토를 만나고 조언을 주고받으며 올바른 길로 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감동을 줄 수 있으면 안 될 일이 없죠. 공직자 후배들에게 항상 잔잔한 감동을 느끼는 일을 하라고 조언하고 있어요.”

첨언하자면 조봉래 국장은 미담 제조기다. 생후 10개월에 아버지를 여의고 10대에 모친상까지 치른 그는 현재 햇수로만 35년째 농촌 고향학교에 장학금을 전달해오고 있다. 또 홀몸어르신들에게 손수 쌀 500포대를 조달해 보내기도 했다. 때때로 고향의 어르신들을 초청해 청와대 구경을 시켜주기도 했다고 한다. 조봉래 국장은 이들이 서울명소와 청와대를 휠체어 타고 관람할 때 눈물 흘리면서 감사해 하는 모습을 보며 공직의 보람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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