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바이오 세대, 인간 수명 연장도 가능해

[한국대학신문 이다희 기자] '살며 생각하며'는 한국대학신문이 우리나라 사회 발전에 큰 역할을 한 분들의 살아온 발자취를 살펴보고 현재 우리 사회를 진단해보는 프로그램이다.

이인원 전 KBS 심야토론 MC이자 현 한국대학신문 회장이 진행하는 '살며 생각하며'는 우리나라 각계 원로를 만나 그들의 살아온 인생을 조명하고 우리 사회 문제와 미래에 관해 얘기한다. 자서전과 역사 기록물의 성격을 갖는 대담 프로그램으로서 유튜브(http://www.youtube.com)와 한국대학신문 홈페이지(http://news.unn.net/) 에서 볼 수 있다.

대담의 두 번째 주인공은 조완규 전 서울대 총장이다. △교육부 장관 △유전공학회 학술협회 회장 △한국바이오산업협회 회장 △한국동물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고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조완규 박사를 만나 그 비결을 들었다. 욕심이 없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는 그의 이야기는 현 시대의 우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 1987년 꼭 30년 전, 서울대 총장으로 취임했을 때 공관 잔디밭에서 인터뷰한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삶의 신조가 그대로인가.

▲ 조완규 전 서울대 총장

"당시 전두환 대통령 임기 7개월 남겨놓고 총장이 돼서 7개월만 하면 잘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4년을 했다. 학생들과 만나서 많은 얘기를 했다. 소통이 중요하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4년 동안 전반기 2년은 힘들었고 후반기 2년은 정말 편했다. 제일 어려웠던 게 민가협이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라고 자녀가 형무소에 갇혔거나 끌려갔던 부모가 모여 만든 단체다. 총장되고 3개월도 안 돼서 두 시간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분들한테 아무것도 해드린 게 없는데 참 좋아하시더라. 두 시간 동안 대학 사정 얘기, 교수들 얘기를 했다. 도서관에서 200~300명의 학생이 농성하고 도서관 앞에 4000명 정도의 학생이 연좌 데모 하고 있을 때다. 민가협 어머니들이 이런 총장이 필요하다고 얘기했다. 만나자 그러는데 못 만나게 하고 교문에서 막고 하면 안 되지 않나. 내가 나올 때 박수 받으면서 나왔다." 

- 30년이 지난 후 서울대 시흥캠퍼스 문제로 소란한데.
"지금 총장이 노력할 거다. 독재나 군사 정부면 이해하겠다. 그런데 신 캠퍼스 옮기는 문제로 학생들이 농성 하는 건 이해 못하겠다." 

- 아버지가 대법원장을 지냈는데 법쪽으로 가지 않고 생물학을 택한 이유가 무엇인가.

"아버지가 청렴하셔서 현직에서도 정말 어려운 생활을 하셨다. 법관하려면 그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법관 하면 안 된다. 판결 냈는데 사람들이 불복하고 믿을 수 없다고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아버지 같은 생활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흥미도 없었다. 오히려 방향을 확 틀어서 사람을 다루는 법이 아니라 생물을 다루는 법을 하자고 생각했다. 

1946년에 문리대 예과에 들어갔다. 예과가 이과 갑이 있고 이과 을이 있는데 이과 갑은 자연과학 계통이고 이과 을은 의학 계통이다. 나는 이과 갑을 택했다. 2년이 지난 후 학과를 선택하는데 화학과 물리학과로 많이 몰리더라. 예과생이 200명 되는데 80~90명이 물리학, 화학과로 모였다. 나는 화학을 하고 싶었는데 도저히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생물학을 택했다. 생물학에는 20명 정도밖에 안 갔다. 그전에 다윈의 진화론, 파브르 곤충기 책을 보면서 생물학에 흥미를 갖게 됐지만 그때는 생물학을 해야겠다는 생각 없이 화학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화학과에 가서 90명 학생과 경쟁하면 힘들 것 같아 생물학을 택했다. 생물학을 하면서도 화학을 할 수 있지 않나. 생화학이니 분자생물학이니 다 화학에 의존하는 분야니까." 

- 생식생물학 교수를 역임했는데 어떤 학문인가.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실험실 가보니까 현미경 세 대밖에 없고 정온기(병원균이나 어린 식물체를 기르기 위해 일정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기기)와 전자저울이 하나 있었다. 아무것도 없을 때 한라산, 지리산 가서 곤충 채집 하는 거나 열심히 했다. 그러다 대학 3학년 때 6ㆍ25사변이 났다. 2년 동안 부산에 가서 공부한 뒤 대학원에 입학했다. 

대학원 입학하고도 아무 시설이 없어서 연구를 할 수가 없었다. 실험을 할 수 없어서 종이와 연필로 할 수 있는 생물학이 뭔가 고민하다 출생 성비를 연구하게 됐다. 영국 어느 학자는 한국이 세계에서 제일 출생 성비가 높은 나라라고 했다. 출생 성비가 여아 100에 남아 113이라는 것이다. 남자를 더 많이 낳는다는 것인데 일본 학자는 여아 100에 남아 100으로 한국이 세계에서 출생 성비가 제일 낮다고 했다. 그럼 내가 한 번 확인해봐야지 싶어 연구를 시작했다. 그래서 성 결정, 성 분화 이런 데 흥미를 갖기 시작했고 생식생물학을 전공하게 됐다. 

실험실 기기가 어느 정도 충족된 1963년에는 어린 난소를 배양해서 난소 배란 유도하는 시도를 했다. 난소에 호르몬을 주사해서 호르몬 작용으로 뇌 호르몬과 난소가 성숙돼 가는 과정을 실험했다. 난자를 떼서 호르몬 주사를 하면 한 번에 20개쯤 미성숙 난자를 얻을 수 있다. 이걸 성숙시키는 건데 성숙한 난자는 조그만 혹 같은 게 생기지만 미성숙 난자는 그게 없다. 그 난자를 배양하면 19시간쯤 뒤에 성숙한다. 거기다 특별한 세포 작용을 저해하는 물질을 섞으면 성숙이 안 되고 19시간 정도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다 새로 배양액으로 옮기면 다시 성숙이 시작된다. 성숙 억제 물질에 대한 연구인 것이다. 이렇게 정자나 난자를 다루는 발생학이 생식생물학이다." 

- 우리나라가 남자를 선호해서 딸을 잘 안 낳으려고 하지 않았나.
"그랬다. 여자들과 인터뷰를 해보면 딸 낳은 건 계산을 안 했다. 인공적으로 남자가 많이 남게 되는 것이다. 인터뷰를 종합해 여아 100대 남아 110으로 논문을 썼다. 

- 바이오산업협회장, 명예회장 등 관계가 많은데 바이오 산업의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보나.

"다음 세대는 바이오 시대다. 지금 IT시대라고 하지만 이 다음은 바이오다. 바이오라고 하는 건 결국 생물학적인 지식을 말한다. 바이오텍을 이용해 인류가 먹고 사는 데 필요한 식량이나 의료 시설을 새로운 지식으로 충족하는 것이다. △메디케어 의술 △바이오 매스(화학적 에너지로 사용 가능한 식물ㆍ동물ㆍ미생물 등의 생물체, 즉 바이오에너지의 에너지원을 의미) △에너지 △식량 등 여러 바이오 시대가 올 거다."

- 바이오산업이 어디까지 갈 것으로 생각하나.
"어디까지라고 얘기할 건 없지만 인류 생존에 필요한 건 다 바이오로 해결할 것이다."

- 인간 수명 연장에도 작용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
"그것도 가능하다. 의료 시술이 많이 나아지니까 수명도 늘어날 것이다. 반드시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살 만큼 살다 가야지 수명이 자꾸 늘어나면 밑에 세대 힘만 든다."

▲ 이인원 회장

- 교육부장관 역임 당시의 일을 들려달라.
"그 당시 교육부장관이 시험지 유출 사건으로 사표를 내서 유력자로 내 이름이 나오기 시작했다. 청와대 비서실장이 전화해서 같이 일하자더라. 내가 못한다고 말했다. 지금 노태우 대통령 임기가 13개월 남았는데 그 안에 교육부 들어가서 내가 할 일이 없고 그런 교육부장관은 하고 싶지 않다고 얘기했다. 하다 못해 2달을 하다 그만둬도 언제 그만두는지 몰라야 힘이 생기는데 지금 들어가면 공무원이 몇 달 있다가 그만둘 사람 말 들을 리가 없다고 하면서 그런 교육부장관 안 한다고 했다. 20분 동안 전화로 얘기 했는데 나중에 이 사람이 화를 내면서 하여간 이따 보도가 나가니까 그런 줄 알라며 끊었다. 그다음 보도가 나갔다. 결국 교육부 장관 13개월을 했다."

- 교육부장관 13개월 동안 어떤 일을 했나.
"맨 처음 상지대를 정리했다. 두 번째 큰 건 인천대다. 교육부장관 한다고 하니까 인천시민이 연판장 가져오고 진정서 내고 전화 걸어오고 난리가 났다. 인천대 백인엽 설립자가 교육기관을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14개를 세웠다. 사방에 송덕비를 세워야 할 텐데 인천시민의 매도 대상이 됐다. 정부로서도 곤혹스러웠다고 그러더라.

장관이 되고 나서 보니까 교육부에서 전혀 손을 안 댄 상태였다. 알아보니 인천대 손댔다가 국장 둘이 사라졌다는 얘기가 있더라. 그러면 안 되겠다 싶어 내가 감사관 불러 인천대 어떻게 했냐고 물어보니 인천시민이 교육부에 낸 '10가지 항목에 100가지 잘못 리스트'를 감사했다고 한다. 조사 결과 14가지가 문제가 있다고 나왔는데 아무 조치도 안 한 것이다. 내가 화를 좀 내고 40명 감사를 보냈다. 감사하고 난 뒤에 보니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 당시 교육부 차관이 선린학원 재단 이사장을 하고 있고 교육부 국장이 이사고 이렇게 돼 있더라. 결국 인천대 백인엽 설립자에게 재단이 낸 돈 일부를 돌려주고 인천시립대로 바꿨다. 현재는 인천공립대가 됐다. 아주 잘 됐다고 생각한다."

- 우리 교육, 특히 고등교육의 문제점이 있다면.
"교육은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누가 나와도 해결책이 없다. 부모의 비뚤어진 교육열이 문제다. 소수의 몇몇 대학에 보내는 게 부모의 꿈이다. 거기에 맞춰서 아이를 초등학생 때부터 과외시키고 새벽 5시에 깨워서 학원 보내 밤 11시에 돌아오게 한다. 그렇게 교육받고 자란 아이가 대학을 나오고 사회에 나오고 있는데 이들이 사회에 제대로 적응할지 걱정이다." 

- 교육 정책의 문제이기보다는 일반적인 교육관이나 학부모의 태도가 문제가 되는 거 아닌가.
"교육은 학교에 맡겨야 한다. 맡겼으면 교육 잘 하도록 해야지 애를 잡을 거 없다. 애를 좀 자유롭게 친구하고 뛰어놀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안 그러면 애들이 자라지 못하고 기가 죽어 커서도 엄마, 아빠 눈치보느라 큰일을 못한다."  

- 정치에는 관심이 없나.
"김대중 대통령이 총재할 때 나에게 총장 그만두고 같이 일하자고 그래서 김 전 대통령이 정치 안 하면 내가 도와주겠다고 하고 아태(아시아태평양)재단 자문위원을 하게 됐다. 자문회의에서 나를 의장으로 추천해 취임사를 했는데 통일, 민주주의를 연구하는 한 단체라서 도와드리지만 정치를 하면 내가 맡지 않겠다고 했다. 7개월쯤 하는데 김 전 대통령이 출마를 안 하면 호남쪽에서 난리가 날 것 같더라. 결국 대통령 출마를 안 할 수가 없게 돼서 그만뒀다. 그 정도로 내가 정치에 생각이 없다." 

- 세계적으로 우리나라가 정치, 경제적으로 발전했는데 국내에서는 잘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경제대국 10위 안에 든다. 경제 성장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기여를 잊어서는 안될 것 같다. 월남 파병 대가로 받은 돈을 카이스트 세우는 데 썼다. 외국 학자 데려와서 서울대 월급의 두 배를 줬다. 대덕연구단지도 조성했다. 서독 간호사·광부들이 눈물 흘린 돈과 가발, 와이셔츠 판 돈, 차관으로 경제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 50년 사이에 세계가 놀랄 정도의 민주화를 이뤘다. 나는 민주화 학생들 절대 가볍게 보지 않는다. 학생과장도 하고 대학에서 계속 교수도 했지만 그때 학생들의 민주화 투쟁, 군사정부의 반대 투쟁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몇 명의 학생이 죽었는지 모른다. 목숨을 잃어가면서도 민주화를 쟁취했다. 내가 학생과장을 하면서 학생편에 섰었다. 지금도 그 학생들과 같이 만난다. 학생들이야 당연히 그런 운동을 해야 하고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대학은 비판할 능력도 키워야 한다. 학문 연구, 봉사 외에 또 하나가 비판이다. 비판 능력을 키워서 정치·사회가 잘 되도록 하는 지성인 역할을 대학에서 해야 한다."

- 90세다. 20, 30, 40대를 되돌아보면 어떤가.
"고령화사회가 되면서 모두 100세 시대다. 나도 이제 10년 있으면 100세다. 100세라니 끔찍한 생각이 든다. 오래 사는 게 좋은 거 같지 않다. 오래 살면 자꾸 주변 사람 걱정하게 하고 폐만 끼친다. 갈 땐 가야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래 살아도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 남에게 신세 안 지고 건강할 수 있도록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1975년부터 매일 아침에 한 시간 반 동안 공원을 걷는다. 운동시설이 있어서 팔, 다리, 허리 운동을 한다. 10분 동안 스트레칭을 하고 그다음에 한 시간 남짓 걷는다." 

- 살아오면서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 극복 했는지?
"나 같이 복 받은 사람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난관이 있어본 적 없다. 어려워서 고민하고 힘들어서 잠 못 자고 이래본 기억이 없다. 그런데 욕심을 내면 난관이 생기더라. 내가 원래 소식에 운동을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마음 비우기다. 마음을 비우는 건 욕심을 비우는 거다. 욕심을 내고 뭔가 자꾸 바라면 고비에 부딪친다. 그런 걸 느껴본 일이 없다. 내가 그동안 많은 보직을 맡았지만 어느 보직이든 내가 하겠다고 나선 게 없다. 그러나 맡은 일에 대해서는 성실하게 했다. 그래서 난관이다 뭐다 하는 걸 겪어보지 않았다. 아내한테 고맙다는 얘기를 해야 한다. 아무리 어려워도 어렵다고 안 하고 내조를 잘 해줬다. 그렇지 않았다면 난관이 있었을 것이다." 

- 어느 시기쯤 되니까 아 인생이란 이런 거구나하고 깨달음을 얻게 됐나?
"인생을 가만히 보면 허무하다. 젊었을 때 꿈을 가졌지만 시간이 지나면 생각이 바뀐다. 꿈은 본래 꿈이라고 생각 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 (왼쪽부터)이인원 회장과 조완규 전 서울대 총장이 원광디지털대 스튜디오에서 대담을 나누고 있다.

 

조완규 전 서울대 총장은…

1952년 서울대 문리대 생물학과를 졸업했다. 같은 대학원에서 1969년 이학박사를 했다. 1995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에서 명예 이학박사와 1996년 호주 그리피스대에서 대학박사를 했다. 1968년부터 1987년까지 서울대 자연과학대 동물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서울대 총장을 지냈다. 1992년에서 1993년까지 교육부 장관을 역임했다. 현재 국제백신연구소 한국후원회 상임고문과 서울과학종합대학원 명예총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동물비교 해부학 』, 『발생생물학』이 있다. 

<정리=이다희 기자 / 사진=조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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