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재 (본지 논설위원/ 초파리 유전학자, 캐나다 오타와대 교수)

한국에서 태어나 기특하게도 과학자가 되기를 원하는 젊은이가 있다고 하자. 그는 어떤 경로를 택해야 할까.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주변 선배와 교수에게 물어도 답은 하나의 길로 수렴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이다. 필자도 그랬다. 대학원에 진학해 박사학위를 받으면 교수가 되는 것인 줄 알았다. 운이 좋아 좁아터진 교수 임용 문턱을 넘었지만 이젠 대학원에 진학하던 시절 막연하게 생각했던 그 바람이 얼마나 나이브하고 비현실적이었는지 잘 안다.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가, 이제는 알게돼버린 이 현실 인식을 지닌 미래에서 온 사람이 된다면 결코 그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 그 누구도 필자에게 대학원이라는 지옥에 발을 딛지 말라는 조언을 해주지 않았다. 힘들긴 하지만 열심히 하면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고문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모두가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실험실 문을 두드리는 학부생들과 최대한 많은 시간 이야기를 나누려고 노력한다. 보통 왜 생물학 실험을 하고 싶은지, 어떤 주제에 흥미가 있는지 묻는다.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면 신이 나기도 하고 아이처럼 들뜨지만, 이야기를 나누던 학생의 눈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열정이 보이면 고민이 시작된다. 처음엔 이 비현실적인 과학계의 현실을 이야기해줘야 하는지 고민했지만 이젠 주로 기탄없이 말해주는 편이다. 생명과학 대학원 과정이 지적으로는 흥미롭지만 경제적으로는 얼마나 초라하고 비참한 생활을 초래하는지, 심지어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도 박사후연구원 혹은 포닥이라는 비정규직 연구원으로 몇 년을 더 경력을 쌓아야 하는지, 그 와중에 결혼 적령기가 돼도 쉽게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정상적인 생활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 되는지 그런 이야기들을 해줘야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생명의 신비를 연구하겠다는 학생에겐 다시 한 번 말한다. 꼭 이 바닥에 발을 디딜 필요는 없다고, 공부는 나중에 취미로 해도 되고 반드시 학위과정을 밟는 것만이 과학에 기여하는 방식은 아니라고.

10여 년 전에 미국세포생물학회에서 조사한 통계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연구환경이 좋은 미국의 통계이니 한국의 실정을 감안해서 받아들일 필요는 있지만 그렇게 하면 더 비참해질지도 모르겠다. 매년 1만6000여 명의 대학원생이 생물학 박사학위과정에 들어오고 이 중 9000여 명 만이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학위를 받는 평균 햇수는 7년이다. 즉 37%는 중간에 학위과정을 그만두는데 이들이 뭘 하고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통계는 없다. 이렇게 박사학위를 취득한 9000여 명 중 70%에 해당하는 5800여 명이 포닥이 된다. 평균 4년을 포닥으로 보낸다고 알려져 있지만 30%는 한 번 이상의 포닥 생활을 보내게 된다. 이들 중에서 오직 15% 만이 종신직이 보장되는 신임교수 자리에 임용되며 나머지 포닥들은 기업체나 비종신 계약직 교수 혹은 대학의 비정규직 연구직으로 일하게 된다. 포닥들을 대상으로 행해진 설문조사에서, 포닥을 경험해 본 이들 중 10% 정도가 자신이 무직 상태나 마찬가지였다고 대답했다.

평균 11년의 긴 과학자 경력을 거치고도 교수가 되는 박사학위자는 전체 학위자의 8.5%에 불과하다. 아마 현재의 통계는 더욱 나빠졌을 것이다. 왜냐면 학위공장인 미국과 중국 등지에서 배출된 어마어마한 숫자의 생명과학 박사들의 양산으로 인해 생명과학계의 양극화와 피라미드화가 더욱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이 통계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결론 중 하나는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라는 모범적인 직업에 종사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교수는 예외적인 직업이다. 또 하나의 결론은 통계에 제대로 잡히지는 않지만 생명과학 박사학위를 받고도 교수나 연구원 등과 같은 학적 직업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의 비율이 절반 가까이 된다는 사실이다. 바로 여기에 현재 생명과학 대학원 교육의 딜레마가 놓여 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생명과학 대학원 학위과정 전체는 교수라는 직업을 가진 학자를 교육시키는 것을 목표로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이런 대학원 학위과정을 거치고 사회에 던져진 박사학위자에겐 별다른 선택지가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박사학위자가 포닥으로 진로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 길이 좋은 길인지 아닌지를 인지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들처럼 생명과학 박사들에겐 별다른 선택지가 없다. 그들 중 극히 일부만이 안정적인 학자로서의 직업을 갖게 될 것이지만 원하지 않는 도박을 하는 것 말고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없게 된다. 그것이 현재 전 세계 생명과학 대학원 과정이 안고 있는 딜레마이며 풀어야 하는 숙제이기도 하다.

당연히 과학계 인력구조의 근원을 개혁하는 일이 최우선돼야 하지만, 정부와 대학 그리고 학술지 등의 삼각동맹이 만들어낸 이 곪아 터진 과학계의 상처를 어디서부터 치료해야 할지, 그리고 그 치료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이런 구조로부터 가장 큰 수혜를 받는 거대 학술지 시장에서조차 이대로 가면 생명과학계가 자멸하고야 만다는 우려가 나오는 실정이지만, 현직 교수들은 이미 이 지독한 경쟁의 승자들로 대학원생의 미래는 그들에게 다른 나라 이야기일 뿐이고 정부에게 과학자란 스포츠 선수만큼도 중요하지 않은 골치 아픈 인적 자원일 뿐이다. 대학원 커리큘럼이 전면적으로 재수정돼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지 오래지만 그 개혁의 주체들이 이미 이 비정상적인 구조에서 혜택을 받은 교수들이다. 국회의원들이 국회 개혁을 할 수 없듯이, 승자인 그들이 악화된 과학계의 구조를 깊이 공감하길 바라는 건 한국의 재벌이 서민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만큼 힘든 일이다. 특히 대학원생을 학자가 아닌 다른 직업군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개혁의 결과는 어쩌면 실험실을 운영하는 교수에겐 치명적일 수 있다. 왜냐면 교수가 가장 원하는 대학원생은 그저 묵묵히 자신의 프로젝트를 수행해주는 과거의 자신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생명과학 대학원은 고사할 것이다. 이미 필자가 재직 중인 캐나다에서조차 생명과학 대학원은 학부생들에겐 기피 대상이 된 지 오래고 대학원에 입학하는 학생의 숫자도 가파르게 줄고 있다. 교수들은 바로 그 현상이 심각해진 이후에야 천천히 움직이려 할 것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서울대 공대 대학원이 미달이 되고 지방대 대학원엔 한국인 대학원생이 줄고 있는 현실은 한국 사회에서 이공계 대학원의 미래가 비관적이라는 기표다. 아마 곧 한국 사회에서 대학원생이라는 직업은 기피대상이 될 것이고 문을 닫는 대학원이 속속 등장하게 될 것이다. 이런 변화에서 가장 치명적인 물리적 현실은 인구절벽이다. 실제로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이 줄어들고 있고 대학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이제 대학원의 정체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됐다. 도대체 현대사회에서 대학원이란 무엇인가. 중세시대 이래의 도제관계에서 전혀 변화하지 못한 이 구시대의 유물인 대학원 제도를 좀 더 유연하고 현실적으로 개혁할 방안은 무엇인가. 사회 전체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하는 주제다. 왜냐하면 그 고민이 주어지지 않은 사회는 아마 반세기도 되기 전에 혁신의 모멘텀을 얻지 못하고 세계의 경쟁에서 밀려나 있을 것이기 때문에.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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