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사이버대 관광레저항공경영학과 교수

홍콩 스타의 거리에서 본 야경
홍콩 스타의 거리에서 본 야경

■ 지정학적 위치와 홍콩 그리고 거문도 = 지정학적 위치란 대항해 시대 범선 타고 거친 대양을 다니던 시절, 물과 생존물품을 보급받기 위해 5대양 6대 대륙의 반도적 전략적 위치를 의미하는 곳이다.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의 제국주의가 차례로 아프리카와 인도 그리고 아시아로 진출할 때 그 지정학적 요충지의 역할은 더 중요하게 됐다. 지금은 퇴색했지만 대항해 시대에는 제국의 흥망성쇠를 좌우할 만큼 그 반도의 꼭짓점 확보에 사활을 걸었다. 지중해의 지브롤터, 터키의 보스포루스 해협, 아프리카 대륙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희망봉, 인도, 스리랑카, 싱가포르와 말래카 해협의 도시들이 그래서 태동한 것이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이 한국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 있다. 거문도가 바로 그곳이다. 구한말 러시아가 부동항을 찾기 위한 전략으로 한반도로 진출하니, 영국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그 머나먼 해로를 뚫고 거문도에 세 척의 무장 함대를 파견해 1885년 3월 1일부터 1887년 2월 5일까지 장장 2년여 진주해 불법 점령 한 것이다. 단순히 주둔만 한 것이 아니다. 영국기를 게양하고 포대와 병영을 쌓는 등 섬 전체를 요새화했다. 그 밖에 함대 주둔을 위한 정박 시설을 건설하고 주둔군은 때에 따라 200∼300명에서 700∼800명으로 늘렸다. 정박한 군함도 5∼6척에서 10척까지 증가했다. 영국군과 거문도민과의 관계는 원만했다고 기록돼 있다. 거문도 어민들은 영국군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고 보수와 의료 혜택을 받았다고 한다. 이에 조선은 영국의 불법 침략에 강하게 항의했고, 청나라도 영국군의 침탈을 빌미로 러시아와 일본의 군대가 들어올 것을 우려해 중재에 나섰다. 그 결과, 영국군은 러시아가 조선 영토를 점령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듣고 1887년 거문도에서 철수했다. 지금도 거문도엔 영국 수병의 묘지 흔적이 남아있다.

홍콩을 여행하면서 느닷없이 영국과 거문도 얘기를 끄집어낸 것은 조선 말 우리가 비록 대외적으로 힘이 없었을지라도 영국의 거문도 침략에 강력하게 대처했기에 그나마 거문도를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자칫하면 거문도가 홍콩과 같은 운명에 휩싸였을지도 모른다는 황당한 상상 때문이다.

홍콩 페닌슐라 호텔 전경
홍콩 페닌슐라 호텔 전경

■ 홍콩의 세계사적 등장 = 중국 즉 청나라가 관심 없었던 한적한 남쪽 어촌마을이었던 홍콩의 지정학적 위치를 간파한 것은 영국이었다. 대항해시대의 마지막에 합류해 아시아에서 그 패권을 펼치기 위한 최적의 장소를 홍콩으로 삼은 것이다. 1842년 아편 전쟁에 승리한 영국은 홍콩을 차이나 대륙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로 삼고자 청나라와 홍콩 섬의 영구 할양을 인정하는 난징 조약을 조인함으로서 대륙의 변경에 지나지 않았던 홍콩이 세계사의 전면에 떠오른 것이다. 이것을 시작으로 1860년 영국은 베이징 조약을 통해 다시금 구룡반도를 분할하고 1898년 신계(新界)와 부속 도서들까지 조차하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에 이어 다시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된 홍콩은 영국이 이곳을 자유 무역항으로 육성했고, 각종 경제 정책이 성과를 거두어 아시아의 진주, 신흥 경제개발 중심지로 성장하게 됐다.

■ 돌아온 옥동자, 홍콩 = 1997년 7월 홍콩은 중국으로 반환됐지만 50년 후인 2047년까지 외교, 군사 등 정치적인 문제는 중국이 통치하면서 사법, 금융, 경찰, 관세 제도 등 자본주의 경제와 생활적인 부분은 홍콩의 이전 모습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그래서 홍콩과 마카오가 당분간 ‘1국가 2체제’라는 국가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미 경제적으로 많이 성장하고 100년 이상 너무 다르게 살아 왔기에 홍콩인들은 자존심과 자부심 때문에 자신들을 중국 사람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고 상당수가 캐나다, 호주 등으로 이주하게 된다. 홍콩인들은 자유무역항으로 잔뼈가 굵은 서구의 자본주의적 경제 관념과 중국적인 유교적 인생관, 도교적 풍수사상을 신봉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시내 중심지 한가운데 있는 웡타이신 도교사원에서 자신이 믿는 신께 가족의 안녕과 부의 축적을 기원하고, 풍수가 좋다는 건물은 고가인데도 구입과 입주를 거침없이 결정한다. 또한 초고층의 중간 부분을 빈 공간으로 남겨 용이 승천하는 통로를 만들어 주는 것들이 유교와 도교적 사상이 어우러진 삶의 모습으로 홍콩을 이해하는 키워드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 홍콩은 영국이 자기 돈을 들여 최고의 명품으로 만들어 중국에 되돌려 주었고 마카오는 포르투갈과 스탠리 호(Stanley Ho) 할아버지가 최고의 카지노 허브로 만들어 돌려받았다. 최근에 방문한 홍콩의 밤은 여전히 아름답고 휘황찬란했다. 아편전쟁으로 영국에 할양됐던 홍콩은 100여 년이 지난 역사의 진통 끝에 잘 자란 아들로 중국 품에 안겼다. 중국 공산당의 만행이 두려워 서둘러 캐나다, 호주 등으로 이주했던 홍콩인들은 본토인들이 진출해 지금 폭등한 부동산가격에 땅을 치고 원통해하고 있다고 한다. 주말 홍콩섬과 구룡반도 침사추이(尖沙咀) 나단 로드는 본토 관광객으로 몸살을 앓고 있고 과잉관광(Over Tourism)의 폐해 우려로 방문횟수까지 제한하고 있다. 이에 더해 홍콩은 주해, 마카오, 심천, 광저우를 연결하는 중국 남부 해안 경제 중심지로서의 역할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홍콩 석양의 크루즈
홍콩 석양의 크루즈

■ 홍콩의 매력 = 왕가위 감독 영화 ‘중경삼림(Chungking Express)’의 양조위와 임청하를 통해 이별과 만남을 퇴폐적이고도 탐미적으로 연출해 안타까운 사연을 들려줬던 오래된 청킹 맨션의 뒷골목도 매력있고, 영화 속 양조위의 집은 구룡반도가 아닌 홍콩 섬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아래 타이청 베이커리 근교에서 촬영한 곳이라는 사실에 더 매력적인 곳이 됐다. 백만달러짜리 야경을 볼 수 있는 구룡반도의 침사추이 바닷가를 따라 난 해안 산책로 '스타의 거리'와 그 뒤편의 페닌슐라 호텔의 ‘애프터눈 티’ 한잔은 홍콩의 현재와 과거를 느낄 수 있는 낭만여행의 진수이기도 하다. 그리고 홍콩 해협을 오가는 스타페리에서 맞는 결코 바다의 짠내가 느껴지지 않는 신선한 홍콩의 바람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에 가면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장국영이 생각나고 탄탄면과 딤섬은 중국 본토보다 더 맛있는 곳이 됐다.

이제 홍콩은 명품 쇼핑하러 가고 미식여행만을 하는 곳이 아니라 새롭게 다시 재생되고 있다. 옥토퍼스 패스 한 장이면 지하철이든 버스든 그 어느 것이든 탈 수 있고 단지 홍콩섬을 오가고 야경만을 보던 홍콩 해협은 이제 초호화 크루즈선이 정박하고 바람과 돛만 있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로열 홍콩 요트클럽 배들이 항해하고 칭다오 맥주와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 됐다.

최상의 가치를 선사하는 홍콩에서의 시간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될 것이다.

홍콩 스타페리
홍콩 스타페리
홍콩 섬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홍콩의 요트정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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