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웅 한양여자대학교 교수

권혁웅 교수
권혁웅 교수

오비디우스의 책 <변신 이야기>는 에코의 슬픈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에코는 본래 수다쟁이였는데, 유노(헤라)의 진노 때문에 길게 말하는 능력을 잃었다. 유피테르(제우스)가 요정들과 바람피우는 현장을 덮칠 때마다 장광설로 그녀를 붙잡아 요정들이 달아날 시간을 벌어주었기 때문이다.

유노의 저주는 이런 것이었다. “나를 속인 너의 혀는 능력이 줄어들어, 네 목소리는 가장 짧은 말밖에는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짧아진 혀 탓에 에코는 다른 이의 말끝을 따라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 그녀가 자기애의 화신인 나르키소스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누군가 자기를 따라다니는 걸 눈치 챈 나르키소스가 소리쳤다.

“거기 누구 있어?”

“있어….”

“누구야? 이리 나와!”

“나와….”

“왜 나를 피하지? 우리 만나자.”

“만나자….”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에코가 그를 껴안자, 나르키소스는 달아나며 말했다.

“저리 꺼져! 차라리 내가 죽고 말지, 네까짓 거한테 안겨?”

“안겨….”

실연의 고통으로 그녀는 비참하게 야위었고 끝내 몸을 잃고 목소리만 남았다. 메아리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야기다. 온전히 고백하는 능력을 잃은 에코,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의 말꼬리에 묻혀 희미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에코, 저 토막 난 문장처럼 끝내 몸을 잃고 사라져간 에코. 이렇게 보면 그녀는 불완전하고 비극적인 짝사랑의 주인공처럼 보인다.

그런데 둘의 대화를 들여다보면 다른 점이 드러난다. 나르키소스의 저 말을 반복함으로써 에코는 온전한 고백을 해내고 있지 않은가? 거기 누구 있어?“(여기 내가) 있어.” 이리 나와. “(응) 나올게.” 우리 만나자. “(그래) 우리 만나자.” 네까짓 거한테 안겨? “(응 나에게) 안겨.”

에코의 말에서 우리는 사랑이 상대방의 말을 온전히 받아 안는 것임을 깨닫는다. 상대의 말을 왜곡하거나 수정하지 않고, 그의 말을 어떤 여운과 함께 따라 하고 되새기기. 그로써 그의 말에 자신의 고백을 온전히 포개기. 이렇게 본다면 에코는 완전한 사랑의 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르키소스는 물에 비친 자기 그림자를 사랑한 나머지 식음을 전폐하고 죽어간 인물이다. 여기에 주어만 바꾸면 에코의 자리가 된다. 나르키소스는 나르키소스를 사랑해서 몸을 잃었다. 에코는 나르키소스를 사랑해서 몸을 잃었다. 자기애(나르시시즘)란 사랑이 겨누는 목적어의 자리에 주어를 다시 놓는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에 자신이 끼어들면, 그 사랑은 불편한 동거로 변한다.

헤르마프로디투스의 얘기가 그런 사연을 전해준다. 그 역시 미소년으로 자랐다. 살마키스란 요정이 그를 사랑해서 구애했다가 거절당했다. 그러자 요정은 그를 뒤에서 껴안고는 신들에게 둘이 떨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신들이 그 소원을 들어주어서, 헤르마프로디투스는 남녀양성인 인간이 됐다. 문제는 이 모습이 사랑하는 한 몸이 아니라는 데 있다.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는 한 몸. 달아나려는 그를 붙잡아둔 한 몸.

하나(나르키소스)는 자기 자신을 사랑했고, 다른 하나(살마키스)는 사랑하는 이를 자기 것으로 삼았으며, 또 다른 하나(에코)는 사랑하는 이를 그의 방식대로 사랑했다. 산에 오를 때마다 우리는 세 번째 사람이 옳았음을, 그녀의 사랑이 승리했음을 소리쳐 기념한다. 그러면 그녀가 여전히 대답해준다. 야호. 야호…….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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