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택 계명문화대학교 군사학부 교수
(해군발전자문위원)

조규택 계명문화대학교 교수
조규택 계명문화대학교 교수

금년은 일제 탄압에 맞서 일어난 3·1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 의미심장한 해를 맞아 나라가 위기일 때 목숨을 바친 분들을 떠올려본다. 수많은 독립투사들 가운데, 정확히 110년 전이던 1909년 우리 민족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한 안중근 장군을 생각하게 된다. 그는 높은 비전을 가지고 교육과 계몽운동을 펼치며 독립을 쟁취하고자 힘썼던 위대한 선각자였다. 더구나 안중근 장군은 평화에 대한 근원적인 혜안을 가진 선비로서 특별히 동양의 평화를 구현하려 했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은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진사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7세에 아버지의 영향으로 가톨릭에 입문해 서양 신부들을 통해 세계정세에 눈을 뜨게 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가산을 정리해 교육과 독립운동에 온힘을 바치게 되고 동양평화에 대한 확고한 개념을 갖추게 된다. 이즈음 두 동생 정근·공근과 함께 일본의 만행과 무단 식민정책에 항거해 나라의 독립을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며 고뇌한다. 안중근은 불굴의 정신으로 일본 군경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대한제국 의병장으로서 의혈 무장투쟁의 선봉에 선다.

안중근 장군은 1909년 10월 26일 러시아 땅 하얼빈역에서 우리 민족의 원흉이던 이토 히로부미를 한 자루 권총으로 척살한다. 이어 벌어진 1910년 2월 12일의 공판에서 안중근은 외국에 있는 동포의 교육, 의군(義軍)의 경영 등에 관여하면서 동양의 평화와 대한의 독립에 관심을 가졌다고 술회한다. 일본이 우리와 같은 아시아 국가로 제국주의 서양의 침략과 러시아에 대항해 중국과 더불어 한·중·일이 함께 협력해 서양의 침입을 막을 것을 희망했다. 안중근 장군은 《동양평화론》에서도 앞과 같은 관점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는 한국·중국·일본 3국이 서로 힘을 합쳐 거세게 침입해오는 서양의 제국주의를 물리칠 수 있고, 세계 평화를 구현할 수 있다고 시종일관 역설한다. 특히 동북아시아 3국의 우호적인 선린관계는 미래에 무엇보다 소중한 자산으로 반드시 화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일본은 같은 황인종으로서 백인종인 러시아보다 더욱 청국과 대한국을 위협하고, 이토가 한·일 양국을 기만하고 무도한 정책을 행하기에, 개인 자격이 아니라 대한 의군 참모중장으로 거사를 감행했다고 밝힌다.

하얼빈 거사에 동참한 우덕순에 따르면, 재판장이 안중근 장관에게 이토를 암살한 이유를 묻자 다음처럼 대답했다고 한다. 암살한 것이 아니라 대중 앞에서 공공연하게 실행한 것이며, 독립전쟁에서 그를 죽였다는 것이었다. 안중근 장군의 위엄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재판정에서 안중근 장군은 “<만국 공법>으로 자신을 처리할 것을 요청했으며, 이토의 죄와 자신의 죄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큰가”라며 일본의 검찰관을 당황하게 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미우라의 뒤에 이토가 있었다는 것을 주장하며, 자신은 국모 시해의 원수를 갚았다는 것이었다. 군인으로서 우리 국모를 시해한 역도를 처단한 행위는 정당한 일이다. 나아가 안중근 장군이 언급한 15가지 이토의 죄상으로 볼 때, 이토를 척살한 것은 대한 의용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대한독립을 위해 실행한 정당한 군사작전이었던 것이다.

나는 안중근 장군의 무장투쟁이 군인의 전범(典範)이며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근원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우리 군에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이란 그의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오며, 앞으로도 잘 계승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동시에 이런 안중근 장군의 무장 투쟁과 더불어 그가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교육자·평화주의자였음도 강조하고자 한다. 특별히 우리는 그의 동양평화 정신을 주목하고 이를 계승해 현시점에서 동북아시아의 안정과 번영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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