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백 본지 논설위원/경희대 사회학과 교수

김중백 경희대 교수
김중백 경희대 교수

최근 교육이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조국 전 장관의 자녀 문제를 둘러싸고 온 나라가 교육의 늪으로 빠져들었고 실제 법원의 판단 여부와 무관하게  대입 공정성 문제는 사람 둘만 모이면 화제가 되는 국민적 이슈가 됐다. 이 칼럼에서 대입의 공정성을 논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관심은 왜 사람들이 이렇게 공정성 문제에 천착하느냐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삶을 반추해 보면 공정하게 삶이 진행되는 경우 못지않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렇게 공정성의 문제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경우는 드물다. 어느 정도는 감내하고, 어느 정도는 자위하기도 한다. 우리는 불공정을 어느 정도는 경험하며 살고 그게 바로 인생이다. 그런데 왜 유독 교육, 특히 고등교육에 있어 우리는 공정성에 민감한가?

이에 대한 답은 매우 간단하다. 좋은 학교에 들어가면 그에 대한 보상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학벌주의로 표현되는 이러한 현상은 사실 우리나라 이외에 다른 국가에서도 유사하게 발견된다. 학벌주의 자체를 비판할 수는 있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학벌을 포함한 계층화 현상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학벌주의는 침략의 질곡을 반영한 아픈 결과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경제성장을 이루는 데 필요한 인력 제공을 위한 국가적 노력의 산물이기도 하다. 오히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부분은 이미 고착화된 학벌체계를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즉, 상위권 대학에 들어가야만 사람으로서 구실을 할 수 있고 인정받을 수 있다는 잘못된, 통념 하지만 심리적으로 공감하는 그 현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대학의 사명이 무엇인지 다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대학의 첫 출발은 지식에 대한 탐구, 계몽에 대한 열망으로부터 시작됐고 이러한 엘리트 교육의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산업혁명 이후 근대국가의 발전과 유지를 위해 필요한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현재 대학은 연구와 교육 그리고 이를 통한 사회공헌을 추구한다. 이 가운데 학벌주의를 개선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부분에 가장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가? 답은 교육에 있다. 연구는 앎에 대한 열정을 통해 인간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 숭고한 행위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연구의 수준은 반드시 대학의 수준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대학이 연구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대학에 연구 잘하는 학자들이 많이 모여 있는지, 연구에 필요한 자원을 어느 대학이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지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인류의 삶을 바꾸는 연구와 지식은 보편 타당한 가치를 가지므로 반드시 어떤 특정 대학의 학생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즉 연구와 학벌주의는 큰 연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시대가 요구하는 지식과 인성을 학습하고, 학벌에 대한 편견을 받지 않고 사회인으로 존중받으며 살아나가기 위해 대학 교육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물론 모든 대학은 나름대로의 커리큘럼을 가지고 교육에 매진하고 있다. 하지만 A 대학의 A 학과를 졸업한 학생과 B 대학의 A 학과를 졸업한 학생이 모두 유사한 교육과정을 통해 유사한 교육 경험만 한다면 우리 사회가 이렇게 많은 대학교를 유지할 필요가 있는가? 이미 고등학교 사교육 시장은 학생의 수준에 맞는 일타 강사가 전국의 수험생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이 옳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경쟁 원리에 입각해 학생의 니즈와 수준에 맞춘 맞춤형 사교육이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대학은 그렇지 않다. 대학이라는 계급장을 떼고 자신의 강의를 유튜브에 올렸을 때 구독자를 확보할 수 있는 교수는 매우 극소수일 것이다. 경쟁력 없이 자신이 박사과정 때 배웠던 지식에 기반한 교육을 천편일률적으로 시행한다면 어떻게 역사적·구조적 산물인 학벌주의를 극복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상황의 타개를 위해 우리 대학은 교육혁신에 매진해야 한다. 교육혁신의 다양한 이슈를 이 짧은 글에서 모두 다룰 수는 없다. 하지만 기본 원칙은 분명히 존재한다. 학생들이 자신의 틀을 깰 수 있게 해 주고 미래 사회를 견인할 창조력을 고양하는 교육을 시행해야 한다. 학교마다 다른 특성과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떠한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해 세세히 살피고 이에 맞추어 교육과정을 구성해야 한다. 학생의 피드백과 사회의 평가에도 귀기울여야 한다. 교실 내의 닫힌 교육에 머무르지 말고 함께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실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누구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지만 대부분 교수들이 간과하고 있는 이러한 부분들이 교육혁신의 핵심이다. 학벌주의는 요소 투입적 성장이 주였던 시대에 유효했던 개념이고 다양성과 개성이 존중되는 시대와는 배치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우리가 학교와 학과의 특성에 맞는 교육, 교수와 학생이 상호 소통하며 성장하는 교육을 시행하고 그 열매를 맺도록 지원을 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학벌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교수의 변화는 자원의 투입 없이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학벌주의를 넘어서는 대학 교육은 교수 개인의 노력이 건전한 재정환경과 결합될 때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대학혁신지원사업은 제한점이 없지는 않지만 3년이라는 기한이 보장돼 있기 때문에 그래도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정책이다. 교육재정 투입은 절대적 금액도 중요하긴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대학과 사회의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장기적 계획수립과 지속적 투자에 있다. 수십억 원이 있어도 정책의 지속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단기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3년 후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돈을 사용하기에 가장 좋고 회계처리를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학생 외유용 비행기표 구매다. 반대로 수천만 원만 있어도 지속성이 담보된다면 한 학과, 한 프로그램에 방향성을 두고 상황에 맞게 육성할 수 있다. 그래야만 개별 대학의 개별 학과 고유의 인재상, 핵심역량, 자존감이 형성되고 우열이 아닌 다름에 기반을 두어 기존의 학벌체계를 완화, 해체할 수 있는 고등교육이 확산될 수 있다.

공정이라는 이슈로 우리 사회가 교육에 쏟는 관심은 긍정의 측면을 분명히 가진다. 이를 계기로 더욱 투명한 제도와 관행이 정착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벌주의를 넘어서는 고등교육의 공정성이 확립되기 위해서는 교수의 노력과 사회의 지원이 결합돼 다양성과 특성화를 추구하는 교육이 꾸준히 지속돼야만 한다. 말로 공정을 달성하기는 쉽지만 진정한 변화는 내부의 노력과 외부의 지원 그리고 전체의 신뢰가 조화를 이루었을 때 가능하다. 아무쪼록 교육혁신을 통한 학벌주의 극복을 통해 우리 사회가 한 걸음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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