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치용 코넬대 연구원

엄치용 코넬대 연구원
엄치용 코넬대 연구원

구하라씨의 슬픈 소식을 접했다. 가수 설리씨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탓에 놀라움은 더 컸다. 이들에겐 자기의 목숨을 스스로 거둘 만큼 어떤 절박감이 있었던 것일까? 그런데 만일 이 절박감이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 시각에도 누군가는 많은 눈물과 힘든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스타가 되기까지 이들이 견디어 냈을 수많은 인고의 시간. 미국의 한 언론은 K팝 스타들의 화려함 뒤에 숨은 인간 존엄성의 훼손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개개인이 고유의 가치가 있으며 존중받고, 윤리적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를 보면 가치는 학벌 뒤에 파묻혀 있고, 존중과 윤리는 직업과 권위에 짓눌려 있음을 보게 된다.

대학을 다니던 어느날 휴학과 동시에 10개월 가량을 건설공사장에서 막노동꾼으로 일했다. 고된 노동에 똑바로 누워 잠을 잘 수 없었다. 새우잠이 허리의 고통을 줄여준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박노해 시인의 ‘노동의 새벽’이 주는 의미를 느낄 무렵, 등교하는 아이의 손을 잡은 엄마가 아이에게 타이르는 말이 들렸다. “너도 열심히 공부 안 하면 저 아저씨처럼 되는 거야.” 내가 규정하고자 노력했던 나의 정체가 다른 사람에 의해 실패한 인생으로 낙인찍히는 순간이었다. 존엄은 나의 자존감과 타인의 배려로 이뤄진다는 걸 알았다. 그날 난 그의 시처럼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부었다.’

많은 아이가 부모에 떠밀려 성공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오르기 위해 학원버스를 탄다. 소질, 재능, 관심으로 운행하는 버스가 아니다. 피아노, 미술, 태권도, 영어학원··· 동네 아이들 모두가 타는 버스에 오르지 못하면 놀 친구도 없다. 학교 운동장 친구는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학입시를 위한 학원은 계량화된 고득점이 목표다. 유명한 학원일수록 학원비는 더 비싸다. 한 가정의 수입이 천차만별인데, 내 아이만 처지게 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부모는 돈벌이에 지치고, 아이들은 알 수 없는 성공의 길로 내몰린다. 스타가 되기까지는 참아야 하는 과정이다. 존엄성은 성공 뒤에야 열어볼 수 있는 판도라 상자다.

친구들과의 얘기로도 풀리지 않은 답답함이 청소년기에 있었다. 베르테르 같은 사랑으로 괴로워했고, 신 앞에선 독자로서의 키르케고르와 니체의 고독을 씹고 다녔다.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으로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한하운 시인의 황톳길을 읊조리며 길을 걷고, 법정 스님의 무소유로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가을의 벤치에서 시를 외우고, 좋은 문장은 낭송했다. 문학작품과 철학은 나의 청소년기에 알게 된 평생의 친구다. 도서관은 집보다 편한 장소였다. 시험 고득점을 위한 독서가 아니라, 같은 또래의 친구들 머리에서 해결할 수 없었던 내 고민거리 해결을 위한 책 읽기였다. 책 안에 인간의 존엄성이 숨 쉬고 있음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났다. 학생부종합전형이 갖는 문제점과 수능 정시확대, 자사고·외고의 일반고 전환 등 교육정책의 변화 예고로 곳곳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논란의 핵심에 형평성과 공평성만을 문제 삼을 뿐, 인간 존엄성 회복엔 아예 관심이 없다. 존엄성은 올바른 사회를 만드는 주춧돌이다. 버클리대학을 비롯한 미국 1000여 개의 대학은 대학입시에 우리나라의 수능시험에 해당하는 SAT나 ACT등 표준시험 의무화 반대에 나섰다. 이들 학교는 점수화에 기인한 학생평가의 불합리성을 지적하고, 학생 개개인의 학문 내용 숙지를 제대로 측정할 기준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제 우리 사회도 미국의 교육학자 라이머가 지적한 바대로 학교가 ‘인간의 숨겨진 잠재력을 개발해주고 서로를 존중해 주는 전인적 인간으로 교육하는 본래의 사명을 저버린다면’ 대학도 죽고, 사회도 죽을 것이란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한국대학신문>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