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희 전남도립대학교 교수
(한국고등직업교육학회 대학지자체상생발전위원장)

한강희 전남도립대학교 교수
한강희 전남도립대학교 교수

얼마만의 산행인가. 가을이 깊어가는 추월산(秋月山)을 찾았다. 가을은 산등성이를 껴안은 오솔길 사이로 꺼억꺼억 우는 갈대꽃 무리를 만들고 있었다. 아침햇발에 산빛을 머금고 가을 물이 뚝뚝 듣는 모습은 한 폭의 수묵화를 바라보는 듯하다. 산허리에서 손채양을 하면 그 아래로 들어오는 아스라한 수북 들녘엔 댓바람이 일렁이고, 크고 작은 마을들이 올망졸망 점묘화로 펼쳐진다.

주희(朱熹)의 칠언절구, ‘뜰 앞에 봄풀 같은 꿈이 깨기도 전에 섬돌 앞 오동나무 잎이 벌써 가을소리를 내는구나’가 실감나는 늦가을이다. 시인묵객들이 봄과 가을을 즐겨 노래한 이유는 두 계절이 안겨주는 특별한 감회가 있기 때문이리라. 언젠가 문학인 전수조사였던가. 많은 시인들의 포에지(poésie)는 계절에서도 봄, 그중에서도 취기가 달아올라 잔뜩 불콰해진 봄밤의 ‘술시(酒時)’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가을 역시 예사롭지 않은 계절이다. ‘이 봄에’, ‘이 여름에’, ‘이 겨울에’에 붙여지는 관형어인 ‘이’는 여느 계절에 비해 가을과 결합할 때 그럴싸하게 품위가 살아난다. ‘이 가을에’라는 표현 속에는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 머어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 인제는 돌아와 /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원숙한 포즈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시선(詩仙)인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이 ‘천지는 만물이 살고 있는 숙소와 같고, 시간은 영원히 흘러가는 나그네 같다(天地者 萬物之逆旅, 光陰者 百代之過客)’고 읊조린 대목을 상기한다면, 가을은 인간들을 향해 삶과 세월의 덧없음을 일깨워주는 계절이기도 하다. 봄이 소생과 약동의 모습으로 비쳐졌다면 여름은 장마와 폭풍우, 작열하는 태양으로 상징된다. 늦봄부터 여름까지의 독한 산고(産苦)가 없었던들 어찌 가을의 결실을 기약할 수 있으랴. 어떤 시인의 시적 성취를 두고 필자는 이렇게 평설을 가한 적이 있다.

“세상의 많은 둥근 것들은 원래부터 둥글었던 게 아니다. 둥근 것들이 마침내 둥긂에 당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나거나, 각지거나, 주름진 추억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모나거나 각진 것들이 둥그런 세계로 나아가게 된 것은 격절과 고립, 그늘과 상처라는 풍화작용을 거쳤기 때문이리라. 둥긂은 한없이 높은 곳으로만 향한 게 아니라 넓고 낮고 유장하게,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기운으로 흘러들어 형성됐을 것이다. 억겁의 시간이 빚은 완도(莞島) 정도리 구계등의 몽돌은 얼마나 아름다우며, 아린 생채기의 아픔을 딛고 돋아난 새살은 저리도 견고한가. 그 쓰라린 그늘과 상처로 인해 자재로운 원융(圓融)의 모습을 내보일 수 있었으리라.”

문재인 정부가 반환점을 돌아서 임기 2년 반을 남겨두고 있다. 왔던 길을 반추해서 소통과 혁신이라는 과제를 매듭지어야 한다. 소통은 쓴 소리까지 새겨들을 때, 혁신은 맞은편 사람들까지 동참할 때 완성되는 법이다. 이미 왔던 길은 초행길이기에 힘들고, 괴로웠고, 상처로 덧나기도 했다. 되돌아가는 길은 보폭과 시간이 훨씬 빨라질 것이다.

국민들은 보수와 진보의 머리띠를 두르고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갈라섰다. 북한과는 냉랭해졌으며, 우방인 미국과의 ‘동맹’은 미궁이며, 일본과는 극한 대립 상태다. 경제는 여전히 장기실업 국면이고, 부동산은 요동치고 있다. 청와대의 ‘일자리 상황판’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수시’와 ‘정시’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입장이 다르다. 부디 모나거나 각진 기억을 반면교사로 둥글고 원만한 ‘공정한 세상’ ‘더불어 잘사는 세상’을 만들어 줄 것을 주문한다.

다시 옷깃을 여밀 시점이다. 청와대 곳곳에 걸린 ‘춘풍추상’(春風秋霜) 현판은 공직자 대상 다짐이다. 차제에 국민 대상 어법으로 바꿔 달 것을 제안한다.

춘풍하우 추상동설(春風夏雨, 秋霜冬雪). 공직자가 국민에 다가서기를 봄바람처럼 하면 감동의 여름비가 내릴 것이요, 자신에 대해 가을서리처럼 엄격히 하면 아름다운 겨울 눈꽃을 뿜어 화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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