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형찬 서울예술대학교 교수

중세 시대에 배움을 갈망하는 젊은이들은 거리가 멀고 가까움에 상관없이 훌륭한 선생을 찾아갔다. 당시 대부분 교육은 성당에 부속된 학교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유명한 선생이 있으면 젊은이들은 몰려갔고, 그곳이 학교가 됐다. 중세 시대에 가장 인간 정신이 충만했고, 가장 열정적으로 가르쳤던 선생이 바로 아벨라르(Pierre Abélard 1079-1142)다.

아벨라르는 중세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며 신학자로 기록됐다. 아벨라르의 철학 실력은 탁월해 논쟁에서 진 적이 없다. 그를 가르친 스승까지도 굴복시켰다. 아벨라르는 프랑스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최고 교육기관인 파리 노트르담 성당 부설 학교(파리 대학의 전신)에서 기욤 드 샹포에게 철학을 배웠다. 아벨라르는 학문의 실력이 늘자 실재론자인 스승 기욤에게 보편론적인 철학을 질문하며 공격했다. 스승은 끈질기게 계속되는 제자의 질문에 더 이상을 답을 하지 못하고 그곳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이처럼 아벨라르는 학문적으로 기고만장했다. 아벨라르는 철학에는 강했지만 신학에는 약했다. 그래서 당시 신학의 최고 권위자인 안셀모를 찾아가 신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눈부신 속도로 신학을 공부했다. 어느덧 신학도 스승의 경지까지 올라갔다. 그러자 아벨라르의 나쁜 습성이 또다시 나타났다. 아벨라르는 스승의 강의에 참여하지 않고 스승의 학문적 전통과 권위를 공개적으로 무시하며 인신공격까지 했다. 그 스승 역시 견디지 못하고 떠났다. 아벨라르는 이렇듯 자유분방하고 직선적이었다. 거짓과 위선을 보면 참지 못했다. 이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그래서 그의 주변엔 적들이 많았다.

아벨라르가 파리로 돌아오자 유럽 각지에서 학생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다. 아벨라르의 눈부신 명성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노천에서 강의가 이뤄질 정도로 학생들이 많이 몰려왔다. 그의 강의가 얼마나 대단한지 머나먼 이탈리아에서 로마 교황과 추기경들, 주교들이 청강하러 왔다. 이렇듯 아벨라르와 학문적으로 겨룰 만한 학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벨라르의 나이는 서른이 조금 넘었다.

아벨라르를 이야기하면서 엘로이즈를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이 ‘중세 최대의 연애사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아벨라르는 나이가 한참 어린 엘로이즈의 가정교사가 됐다. 이들은 공부보다는 사랑에 관심이 많았다. 아벨라르는 ‘책을 펼쳐 놓았으나 철학보다는 사랑의 말을 더 많이 속삭였다’라고 고백했다. 이들은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비밀 결혼식을 올렸고, 그때부터 갖가지 고난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결국, 엘로이즈는 수녀가 되고 아벨라르는 수사가 됐다. 후에 아벨라르는 사제 서품까지 받았으나 말년에는 종교회의에서 이단자로 선고, 수도원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엘로이즈도 세상을 떠났으며 이들의 시신은 유언대로 합장됐다.

아벨라르가 후대에 학문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철학적 방법론이다. 아벨라르는 학문을 탐구할 때 늘 의문을 품었다. 그는 ‘지혜의 첫 번째 열쇠는 의문이다. 의문이 우리를 탐구로 이끌고 탐구에서 우리는 진리를 깨닫는다’라고 말했다. 아벨라르에게 영향을 받은 대표 학자가 토마스 아퀴나스다. 그는 아벨라르의 방법론을 통해 기독교와 당시 이단으로 취급받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조화시켰다. 아벨라르는 중세 시대의 신 위주의 차가운 학문에 뜨거운 인간 정신을 접목시킨 학자였으며 젊은이들을 끝없는 향학열에 불타게 만든 최고의 교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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