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형찬 서울예술대학교 교수

백형찬 서울예술대학교 교수
백형찬 서울예술대학교 교수

한 조선 화가의 작품이 발견돼 미술계가 흥분하고 있다. 김명국이 일본에서 그린 인물화다. 김명국은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던 동안,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일본인들에게 많은 그림을 주문받았다. 그의 그림은 조선에서보다 높은 값을 받을 정도로 현지에서 인기가 높았다. 가난한 화가였던 김명국은 적지 않은 돈을 벌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도 전해지는 작품이 없었다. 그러다 얼마 전에 김명국이 일본에서 그린 작품이 발견된 것이다. ‘수노인도’라는 이 인물화에는 ‘金明國印’이라고 인장이 뚜렷이 찍혀있고, ‘醉翁’(취옹)이라는 친필 서명도 적혀있었다. 놀라운 발견이다.

김명국은 양반도 상민도 아닌 중인이었다. 도화서 화원으로 그림을 그렸다. 사람들은 그를 ‘신필’이라 칭송했다. 또 어떤 사람은 ‘그림 속에 들어 있는 귀신’이라고 했다. 그토록 그림을 잘 그렸다. 김명국 이전에도 또 이후에도 조선시대에는 유명 화가들이 있었다. 몽유도원도의 안견, 고사관수도의 강희안, 진경 시대를 연 겸재 정선, 풍속화로 유명한 단원 김홍도가 있었으나 김명국만큼 추앙받지는 못했다.

김명국이 그림을 얼마나 잘 그렸는지, 다음과 같이 이야기가 전해온다. 왕이 김명국의 그림 실력을 시험하고 싶었다. 그래서 비단으로 감싼 빗접을 주며 그림을 그리라고 명했다. 며칠이 지난 후에 왕에게 빗접을 올렸다. 그런데 왕은 빗접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림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크게 화를 내며 물었다. “그림이 전혀 보이질 않는데 감히 그림을 그렸다고 거짓말을 하느냐?” 김명국이 대답했다. “전하, 소인은 분명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 공주가 그 빗접에 든 빗으로 머리를 빗으려 했는데 이 두 마리가 가장자리에 붙어 있었다. 공주는 이를 죽이려고 손톱으로 눌렀다. 그런데 이가 죽지 않았다. 공주가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그림이었다.

김명국의 대표 작품으로 달마도를 든다. 달마는 중국 선종의 시조로 남인도 향지국이란 나라의 셋째 왕자인데 중국 소림사에서 9년 동안 면벽 좌선해 득도한 스님이다. 그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달마도다. 붓질은 몇 번만 했다. 순식간에 큰 눈, 둥근 코, 짙은 눈썹, 수북한 콧수염과 턱수염을 한 달마가 완성됐다. 달마의 기가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림 한편에는 자신의 호인 ‘蓮潭(연담)’을 휘갈겨 썼다. 이렇듯 달마도는 단순하면서 강하다. 김명국의 호탕한 성격이 그대로 담겨 있는 듯하다. 현재 이 달마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김명국은 술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술에 거나하게 취해야지만 붓을 들었다. 그에게 그림을 부탁하려면 술대접을 잘해야 했다. ‘술 취한 늙은이’란 뜻의 ‘취옹(醉翁)’을 아호로 쓸 정도였다. 술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한 스님이 지옥 그림을 청하면서 삼베 여러 필을 내놓았다. 삼베는 즉시 술과 바꿔 마셨다. 술에 취하자 비단을 펼치고 순식간에 그림을 그렸다.

며칠 후 그림을 찾으러 온 스님은 깜짝 놀랐다. 지옥 속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스님들이었다. 잔뜩 화가 나 그 이유를 물었다. 그랬더니 “스님들이 백성을 속이는 짓을 평생 했으니 지옥에 있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니겠소?”라고 답했다. 더욱 화가 치솟은 스님은 삼베를 돌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김명국은 껄껄 웃으면서 “술이나 더 사가져 오시오. 그러면 그림을 고쳐주리라.” 그러자 스님은 화를 꾹 참고 술을 받아왔다. 김명국은 그 술을 기분 좋게 마시고는 그림에 붓질했다. 스님 머리에 머리털을 그리고, 수염이 없는 사람에게 수염을 그렸다. 그리고 잿빛 승복에 색을 칠했다. 그랬더니 그림은 전혀 딴판이 됐다. 스님은 무릎을 치며 크게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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