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전 교총 회장)

바로 이 순간에도 내 지갑 속에는 이 세상에서 아무도 모르는, 그러나 나만이 아는 귀중품이 있다. 설사 세상 사람들이 그걸 육안으로 확인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의 귀중품이라곤 아무도 생각지 못한다. 오직 나만이 그렇게 귀중한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S00299526」, 이 번호를 미국 메사추세츠주 경찰에 조회하면 금방 그 실체를 알 수 있다. 즉, 메사추세츠주 보스톤 경찰서 1979년 발행 자동차 운전면허증, 그리고 1983년 10월 4일 시효소멸이란 사실을 쉽게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왜 귀중품인줄은 여전히 이해 못할 것이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1979년 8월 미국 하버드 옌칭연구소 객원 연구원으로 초빙돼 1년 계약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때 마침 제자가 찾아왔다. 자기가 중고차를 샀으니 80년 8월 귀국 때까지만이라도 사용하시고 떠날 때 반환해주십사하는 것이었다. 나는 극력 사양했다. 그러나 그의 정성을 더이상 뿌리칠 수 없었다. 그는 난방비를 아끼느라고 가스레인지를 켜놓고 자는 어려운 형편이었기에 나는 더욱 마음이 불편하였던 것이다. 그는 법이 없어도 살만한 선량한 젊은이었고 차는 불과 250불짜리 덜커덕거리는 폐차 직전의 중고차이었기에 나는 더 이상 그 호의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자동차 운전면허 학과시험과 실기(시내 운전)시험을 쉽게 통과하였으니 소위 "쯩"(운전면허증)만 받으면 된다. 신청서를 제출했더니 2주 후에 와서 받아 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지인에게 "쯩"을 받는 다음날 지인에게 운전으로 봉사하겠노라고 약속까지 했다. 그러나 막상 당일 지정된 장소, 즉 보스톤 경찰서 교통과에 가 보니 옛날 초등학교 강당 절반 가량의 큰 사무실에 경찰관들이 질서정연하게 앉아 숙연하게 업무처리를 하고 있었고, 출입구 쪽에는 민원 카운터가 길게 마련되어 있었는데 민원인으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나도 그중의 한사람이 되어 내 차례까지 장시간을 기다렸는데 막상 나를 보더니 "면허증을 내 줄 수 없다. 신청서를 다시 쓰되 싸인을 영자 알파벳으로 하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내 싸인이 문제가 된 것이냐?" "그렇다. 이게 어느 나라 글씨냐?" 바로 여기서 내 항의 연설이 터져 나왔다. "너희 나라 사람들은 한국을 비롯해서 세계 도처에 다니면서 너희 문자로 싸인해도 되고 다른 나라 사람들은 자기네 문자로 싸인을 하면 안 된다는거냐? 싸인이란 뭐냐? 동일체임을 증명하면 되는게 아니냐? 그러므로 내 여권의 싸인과 운전면허증의 싸인이 일치하면 되는것이지 어느나라 문자인가가 왜 문제가 되느냐? 나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내 싸인을 언제나 한국어 문자로 싸인 하면서 살아왔다. 거기에 무슨 잘못이 있다는 거냐?"

내 목소리는 그 강당을 떠들썩하게 흔들어댔다. 급기야 제일 안쪽의 어느 방에서 어깨와 가슴이 쇳조각으로 번쩍거리는 고급경찰관이 나타났다. 총책임자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서서히 걸어오더니 그 담당 경관에게 사연을 물었다. 내가 먼저 같은 요지로 또 한번 소리높여 답하였다. 나는 내가 그토록 아끼고 자랑하는 한글이 이 미국땅에서 엉뚱한 녀석한테 수모당하고 있다는 불쾌감과 동시에, 세종대왕과 성삼문, 신숙주, 정인지 등의 집현전 학사들, 그리고 주시경, 최현배, 허웅 선생 같은 우국충정의 한글학자들을 대신해서 싸워야겠다는 소명감이 불같이 솟아올랐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어찌 서투른 남의 땅에서 서투른 남의 언어로 그렇게 열변을 토할 수 있었겠는가? 나를 멀끄럼히 쳐다보며 듣고 있던 그 고급경찰관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면허증 내 줘라"라고 지시하고 사라졌다. 그렇게 해서 받은 바로 그 운전면허증이 무려 40년 동안 내 지갑 안에서 자랑스럽게 숨 쉬고 있는 것이다. 그 옛날을 회상해보니 보스톤 경찰서의 그 담당 경찰관이 그 당시에는 몹시 괘씸했으나 지금에 와서 보니 안쓰럽고 미안할 뿐이다. 교양과 식견이 부족해서 그랬던 걸 어찌하랴.

그와 반대로 나를 웃겼던 미국 할머니 한 분이 있다. 학과의 직원이었다. 1960대말, 내가 미국 존스 홉킨스대학 정치학과에서 수학하던 때이다. 나만 보면 "미스터 윤"하더니 언젠가는 내게 "퍼스트 네임"으로 부르면 안 되겠냐 그래서 "암, 좋고 말고요"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 할머니가 "형섭"이란 발음을 도저히 못 하는 것이다. 그러더니 영어 이름으로 하나를 택하라는 것이었다. 예컨대 "존", "딕", "봅" 등이다. 나는 끝내 거절했다. 내가 어찌 미국 닉네임을 쓸 수 있겠는가? 그리고 대안을 내놓았다. "형"이라 부르게 했다. 나중에는 나보다 20년 연상인 주임교수마저 나만 보면 "형"이라 하더니 하루아침에 학과의 모든 교수들과 학생들이 내 동생이 되어버렸다. 매우 즐거웠다. 그 비서 할머니는 나중에는 한글로 "형"을 쓸 수 있게까지 되었다. 난 한글 자모음 24자도, 그 배합의 원리도 알려주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펄벅이 "세종대왕은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거나 또는"한글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과학적인 문자"라고 극찬을 하더니 그 여직원 할머니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며 놀랬다. 더구나 일주일만 공부하면 모든 소리를 적어 낼 수 있다 했더니 그것만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마도 인도네시아에서 자기네의 소수민족 언어인 "찌아찌아어" 또는 "꽈라아에어"를 표기하는 보조 문자로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들으면 그 할머니는 한층 더 놀랐을 것이 분명하다. 훈민정음이란 이름으로 창제(1443)되고 반포(1446)된지 574년, 이를 지켜내다가 목숨까지 바쳤던 조상의 넋이 어쩐지 올해에는 유난히 내 가슴을 친다.

※ '살며 생각하며'는 대한민국 저명인사의 인생 스토리와 철학, 경험담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살며 생각하며'에는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전 교총 회장)이 함께 합니다.

■윤형섭 명예교수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와 미국 존스 홉킨스대에서 정치학석사학위를, 연세대에서 정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처장, 사회과학대학장, 행정대학원장 등 주요 보직을 역임했고 한국정치학회 회장,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건국대 총장, 호남대 총장, 교육부 장관 등을 지냈다. 현재 연세대 명예교수와 단국대 석좌교수 등을 맡고 있다. 

<한국대학신문>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