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 충남대 교수/본지 전문위원

올해로 우리나라에서 방송이 시작된 지 78년째다. 텔레비전 방송의 역사는 근 50여 년에 이른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우리나라의 방송 역사상 요즘처럼 방송보도의 편파성 여부가 시비거리로 회자된 적이 또 있을까. 방송이 일제와 군사독재의 한갓 통치수단으로 전락한 오랜 세월을 뒤안길로 하고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제도적으로 보장받은 오늘날에 와서야 방송이 동네북 마냥 취급되는 역설은 다분히 희극적이다. 지난 미국 대통령 선거 기간 중 세계 자동차 산업의 중심도시인 디트로이트 지역의 한 유력 일간지는 ‘부시 지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이유인 즉 친환경주의자인 고어가 대통령이 될 경우 자동차 공업에 대한 규제가 강화될테고 따라서 디트로이트 지역경제가 위축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지역주민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는 하나 언론이 반환경적 성향의 후보를 바로 그 이유에서 공공연히 지지하고 나서는 것은 우리 상식에 비추어볼 때 꽤 낯선 풍경이다. 미국에서는 신문이 사설 등을 통해 지지후보나 정당을 밝히는 것이 오랜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1980년에서 1996년 사이의 5차례 대선에서 보다 많은 신문사의 지지를 획득한 후보가 모두 당선됐다는 연구결과가 최근 밝혀지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서도 신문은 이제 독자의 판단을 적극적으로 돕는 ‘개입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실제로 지난 대선을 앞두고 신문의 지지후보 표명이 오히려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다수 제기되기도 했다. 공정성을 저해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지만 신문은 어느 정도 정파성을 띨 수 있다. 이에 비해 방송은 어떠한 경우에도 불편부당성이나 중립성을 훼손할 수 없는 미디어로 간주되고 있다. 방송에 할당되는 자원으로서의 전파는 희소할 뿐더러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지닌 온 국민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탄핵정국에서 불거져 나온 편파방송 시비는 신문과 현격하게 다른 방송매체의 특성에 충실한 논법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야당과 일부 언론에서 주장하고 있듯이 방송의 탄핵보도가 편향적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첫째, 탄핵안 가결 자체는 언론으로서의 방송사가 도저히 회피할 수 없는 핫이슈였다. 헌정 초유의 사건임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은 일이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벌건 대낮에 일어났다. 언론학 교과서마다 언급되는 뉴스가치의 요소인 시의성과 저명성, 영향력, 인간적 흥미, 갈등, 신기함, 서스펜스 등이 골고루 배합된 그야말로 사건의 뉴스화를 위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사정이 이럴진대 언론을 향해 과잉보도를 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은 학생들에게 공부하지 말라고 주문하는 격이다. 오히려 야당의 소신대로 탄핵안 가결이 정당한 일이라면 이를 과잉보도한 방송에 고마워해야 할 일 아닐까. 둘째, 편파성의 기준은 기계적 중립성이 아니라 역사적 진실이다. 언론은 사회적 의제가 설정되면 가급적 다양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특히 소수자의 목소리에도 관심을 기울여 이들의 입장이 배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이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견해에 똑같은 시간을 배분하고 동등한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주의에 매몰될 필요는 없다. 정작 중요한 일은 사안을 둘러싼 논란의 쟁점과 이를 바라보는 각계의 시각이 포괄적이고 선명하게 프로그램에 담겨 있느냐는 것이다. 방송보도의 기계적 중립성은 양시양비론으로 귀결되기 쉽다. 여기에 함몰되면 진실은 은폐되고 역사는 한발자국도 진보하지 못한다. 지난 시절 방송의 행태 자체가 필요하고도 충분한 증거 아닌가. 그러고 보면 총선을 앞둔 지금 우리의 시빗거리는 방송이 아니라 진실과 역사가 되어야 한다. 더 이상의 코미디에 장단 맞추거나 대꾸할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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