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학년도 대학 입시에 처음 도입돼 각 대학별로 치르는 통합교과형 논술이 시작부터 본고사 형태로 변질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대를 비롯해 고려·연세·서강대 등 수도권 상위권 대학들이 이런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 어떤 문제 출제됐길래? =11일 2008학년도 정시 모집 논술고사를 치른 서울대는 자연계열 논술고사에서 정답을 요구하고, 풀이과정을 명료하게 쓰도록 했다. ‘모세혈관의 혈류속도’나 ‘체지방률’, ‘복사 에너지’ 등의 구체적 수치를 구하는 문제가 여럿 출제됐고, 수학 공식이나 과학적 원리를 증명하는 문제가 나왔다. 고려대는 자연계열 논술고사에서 대학 수준의 ‘정수론’ 공식이 필요한 문제와 각도를 적분으로 표현한 문제를 출제했다. 모두 고교에서는 배우지 않는 것들이다. 서강대도 고교 수준을 뛰어넘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바탕으로 한 문제를 냈다. 연세대는 수시2학기 자연계열 논술고사에 이어 이번 정시모집 논술고사에서도 고교 기본 개념의 이해만으로 풀기 어려운 고난이도 문제를 냈다.

■ 통합교과형 논술=본고사? =서울대는 “문제의 모든 지문을 수학·과학 교과서에서 뽑는 등 고교 교육과정에 맞춰 출제했다”며 ‘본고사 변질’ 논란을 일축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를 분석한 교사들은 하나같이 “현재의 서울대 문제 형식에 난이도만 조금 더 높이면 예전 본고사”라고 평가했다. 김흥규 서울 광신고 교사는“서울대가 본고사로 가는 물꼬를 텄다”고 지적했다. 서울대가 선두에서 틀을 깬만큼 앞으로는 다른 대학들도 난이도를 좀 더 높여 서울대 형식의 문제를 출제할 우려가 크다는 것이다.

고려·연세·서강대 등은 “고교에서 배우지 않는 개념이 출제될 경우 지문에 설명을 해준다. 이를 통해 수학적 추리력이나 활용력 등을 평가한다”고 출제 배경을 설명했다. 하지만 최수일 전국수학교사모임 회장은 “학생들은 시험에 출제된 이상 학원 등에서 배워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과학고 등 특목고 학생이나 올림피아드 시험 준비생들이 이미 대학 수준의 수학·과학 지식까지 배우고 있어, 대학들이 이들을 배려한 문제를 출제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교육인적자원부의 방관도 통합교과형 논술고사의 본고사 변질과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서울의 한 과학고 교사는 “대학들이 지난해 자연계열 논술고사에서도 올해와 비슷한 문제를 출제했으나 거의 교육부로부터 가이드라인 위반 지적을 받지 않았다”며 “눈치 빠른 대학들이 올해 좀 더 나아간 것 같다”고 말했다. 남호영 서울 영신고 수학교사는 “가이드라인을 두고 쓸데 없는 논란을 벌어지 말고, 고교 교육과정 안에서 해결 가능한 문제인지를 기준에 두고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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