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어 헉" 숨이 가쁘다. 3년 전에 얻은 협심증이 또 말썽이다. 알약을 +털어 넣고 가쁜 숨을 고른다. '드르륵' 문 여는 소리와 함께 학생이 들어선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구두밑창 갈려고 왔는데요"

벌써 18년째다. 구두만 만진 것이. 지금은 백발이 성성한 영락없는 노인네의 모습이지만 처음 이곳에 발을 들여놓을 때만 해도 무쇠라도 삼킬 수 있을 만큼 혈기왕성했다.

"허허, 세월에 장사 없다드만 그 말이 꼭 맞는기라. 그래도 내는 복 +받았제. 젊은 사람들하고 있으니 기운이 절로 솟는기라. 이래 하찮은 일 같아도 5남매 공부 다 가르치고 시집장가 보냈데이. 자슥들은 몸도 안 좋은디 그만 쉬라고 야단이지만도 놀믄 뭐 하노"

동국대의 터줏대감 임승만 할아버지(66). 낡은 TV와 음질 나쁜 라디오 외엔 모조리 구두수선에 필요한 물품과 슬리퍼뿐인 손바닥만한 구둣방에서 20여년을 살았다. 가슴 한켠에 그리움을 가득 쌓아 둔 채.

"전쟁만 아니었으믄..."

살아 생전 다시는 밟아 볼 수 없다고 포기해 버린 함경도 흥남땅. 그의 고향이다. 독선생을 모셔 둘 만큼 꽤 넉넉한 집안의 둘째 아들에 흥남 기술학교 제1기 졸업생이자 함경남도 축구대표선수를 도맡아 하는 잘 +나가던(?) 청년이었다. 적어도 전쟁이 나기 전까지는.

1950년 6월, 전쟁통에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피란민에 섞여 남쪽으로 휩쓸려 내려왔고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군에 입대했다. 입대 1주일만에 최전방에 배속돼 호된 전쟁을 치렀다. 그리고 8년만에 겨우 제대를 했다.

지게질에 막노동에 온갖 허드렛일을 다 하다가 손재주 하나 믿고 시작한 구두수선. 지금은 "내래 못 고치는 구두면 버려야 한데이. 조선팔도에 +내만한 재주꾼이 없는기라"하며 으름장을 놓는다.

대학역사를 기록한 자료가 있다면 그보다 더 정확할 수 있을까. 18년을 대학에 머물며 학생들과 함께 호흡한 걸어다니는 대학의 산 증인이다. 장발에 나팔바지의 대학생에서 배꼽티에 힙합바지의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내래 옛날 사람이라 그런지 아무래도 옛날 대학생이 좋은 기라. 요즘 +아그들은 발랄하고 생기 있어 좋긴 한데 영 학생 같지가 않은기라. 하고 댕기는 꼴도 그렇고. 모름지기 공부란 때가 있는 기라"

초창기보다 못하지만 요즘은 IMF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하루 평균매상이 4만원에서 10여만원으로 껑충 뛸 정도로 손님이 크게 늘었다. 대부분 학생들이 주된 고객이지만 교수들도 적지 않다.

"제일로 더러븐 거? 있제. 간혹 일이천원 깎아 달라는 째째한 교수가 +있데이. 많이 벌면 뭐하노. 그치만 학생들은 절대 안 그런다. 고런 것은 선생 안 닮아도 된다"

나라 경제가 어렵다더니 학생들도 영향을 많이 받는 모양이다. 어느 +졸업생은 도서관으로 출근을 한다며 머쓱해 하고 학생식당도 점심시간을 한두시간 늦춘 뒤에야 겨우 자리를 잡을 수 있을 만큼 연일 북새통을 이룬다. 이번 기회에 학생들도 '고생'이 뭔지 느껴봤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고향 생각하믄 뭐하노. 다 부질없는 짓 아이가" 사무치는 그리움에헤진 구두를 수선하는 손길이 빨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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