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근 성신여대 총장

이성근 성신여대 총장
이성근 성신여대 총장

아무리 부정하더라도 국내 대학은 이미 서열화돼 있다. 수험생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는, 그리고 인터넷만 검색해보아도 찾을 수 있는, 동요같이 암송되는 대학의 서열이 있다. 대학 스스로가 서열을 바꾸는 것도 어렵지만 그 서열에 아예 없는 대학도 많다. 서글픈 이야기지만 학생들의 대학 선택은 오랜 시간 사람들의 인식에 있는 그 서열에 의존해 왔다. 

이번 칼럼에서 ‘대학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얘기를 하고자했으니, 먼저 대학 존속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재정적 측면에서 대학의 지속가능 여부에 대해 생각해 보자. 한마디로 대학이 처한 작금의 상황은 어렵다. 재정 건전성을 논하는 것이 사치스러울 만큼 빈약함 그 자체다. 지금 와서 누구에게 책임을 지울 수도,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도 없다. 적어도 대학과 관계한 사람들은 오늘의 현실에 대해 예측할 수 있었다. 이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학이 재정적으로 어렵다고 해서 기업처럼 경영할 수 없다. 기업은 투자해서 돈을 벌어들이고 그것을 다시 투자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기업은 정책적 인수합병도 가능하며, 여러 방법으로 기업의 경쟁력을 높여갈 수 있다. 그러나 대학은 투자한 성과가 재정적 측면이 아닌 사회에 필요한 우수 인재 양성이라는 추상적 목표를 근간으로 한다. 

따라서 제아무리 재정 확대 묘수를 알고 있더라도 대학을 기업과 같은 방식으로 경영하기는 어렵다. 등록금과 연구과제수주와 같은 제한되거나, 사용처가 분명한 재원을 가지고 대학의 재정 개선을 기대하기란 힘들다. 솔직하게 말하면 현 제도 속에서 대학의 재정적 발전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가끔 대학들이 기부금을 기대하고, 그 기부금을 받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지만 이 또한 녹록하지 않다. 대학 기부금만큼 ‘빈익빈 부익부’의 논리가 지배적인 곳도 없기 때문이다. 일부의 몇몇 대학을 제외하고는 현상 유지마저 어려운 것이 대학 기부금의 세계다. 또 다른 방안으로 해외 유학생들을 통해 대학 재정의 일부를 개선하기도 한다. 그러나 교육의 질을 염려하는 국내 학생들의 곱지 않은 시선과 이들의 지도에 애로를 느끼는 교수들의 불만을 극복해야 하는 게 숙제다.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없다.

이처럼 재정 개선을 위해 대학이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지만 이조차도 단기적이고 일시적인 처방일뿐 충분한 재정을 확보하는 데에는 역부족이다. 필자가 대학 재정을 논하는 것은 사회에 필요한 인력을 양성하고, 대학이 사회에 공헌하려면 결국 재정적 안정은 선결 조건이라는 점을 주지하기 위해서다. 《와세다대학의 개혁》을 쓴 세키 쇼타로도 “재정적인 독립 없이 학문의 독립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대학을 기업과 유사한 방식으로 경영할 수는 있지만 결국 대학과 기업은 그 산출물이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현 시점에서 대학의 재정 안정화가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며 대학들의 재정 개선을 위한 힘겨운 노력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눈물겹기까지 하다. 

내적인 반성도 고려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재정 확충은 고사하고 대학이 학생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도 불투명하다. 대학이 사회가 필요로 하고, 학생들이 원하는 지식을 제공하고 있는지에 대한 반성이라고 할 수 있다. 수명주기가 갈수록 짧아지는 지식의 변화 속도를 대학은 따라가기가 어렵다. 아니, 변화 자체를 대학이 거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대학의 구조적 변화를 이성적으로는 수긍하면서도 실제적 변화에 대해서는 대학 구성원들이 상당히 소극적인 편이다. 그것은 교수도, 학생도 같은 입장이다. 대략 그 이유가 짐작은 되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금기시된다. 결국 변화에 대한 저항이나 소극적 태도도 재정만큼이나 대학의 지속가능성을 낮추는 요인이며, 이 때문에 대학은 사회나 학생이 요구하는 지식의 생성과 전달에 실패하고 있다. 대학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지식을 제공할 수 없으니 본원적 역할 수행에서도 실패하며, 지속가능성은 근본적으로 의문시된다. 사회와 학생이 외면하는 지식을 대학이 고집하는 한 대학의 지속가능성은 불가능하다. 

이미 대학이 아니더라도 대학의 기능을 대신할 많은 대안이 있지 않은가? 유튜브를 보면 웬만한 지식을 다 얻어낼 수 있다. 필자는 이를 ‘유튜브 대학’이라고 부른다. 구글을 검색하면 궁금해할 만한 지식을 찾아낼 수 있다. 속칭 ‘구글 대학’이다. 대학이 과거에는 지식의 생산과 유통을 담당했지만 이젠 대학이 그 기능의 유일한 대안이 아니다. 사람들이 필요한 지식은 이제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 어디에서나 얻을 수 있다.

재정 확충과 지식 제공 역할에 관한 체념은 그래도 고상한 푸념이다. 아예 학생자원이 없어지고 있다. 그래도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부족한 학생자원을 대학들이 어떻게든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최근에는 이마저도 힘들어지고 있다. 대학의 입학자원은 고사하고, 초등교육이나 중등교육의 입학자원도 부족하다. 솔직히 말하면 앞으로 대학의 역할 회복에 대해서는 백약이 무효일 수 있다. 

여전히 대학에서는 다양한 논쟁이 활발히 진행 중이다. 생존의 문제에서부터, 대학 내 민주화의 문제, 구조 개혁의 문제, 교원 업적 산정의 문제, 강의 평가의 문제 등 많은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도 지속가능성이라는 전제하에서만 의미가 있다. 따지고 보면 실제로 교수들에게 연구기능을 요구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논문이라는 잣대로 교수들의 성과를 재단한 것이 불과 30여 년쯤 되었을까? 논문의 등급을 정하고, 연구윤리의 의미를 정한 것이 30년이 채 되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고등교육이 이제는 논문을 떠나 머지않은 미래에 대학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휩싸여 있다. 논문을 쓰고, 논문의 등급을 정하는 일이 점점 호사스러운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대학에서 공부하고, 대학의 시스템을 체득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경험세계를 과감히 버려야 할 시기가 도래했다. 어제의 관행과 논리가 오늘의 규범이 될 수 없는 시기가 온 것이다. 세상과 학생들은 큰 걸음으로 변하고 있는데 대학은 여전히 잰걸음조차도 변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그 배경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대학의 갇혀있는 사고가 사회의 변화에 어떻게 투영될 것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자문할 시기가 왔다. 작년과 올해가 다르고, 내년에는 더 달라진다. 이런 시기에 있어서 대학은 사회에 어떤 존재이며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필자도 미래에 대한 공약을 내걸고 총장에 선임되는 과정을 거쳤지만, 이즈음 한 번쯤 자문하고 싶다. 대학은 사회에 무엇을 주고 있는가? 대학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해 답할 준비가 돼 있는가? 과연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는가?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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