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 호<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

제도적으로 본다면, 상대적으로 위축된 면이 있긴 하지만, 대학교육에서 인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크다. 인문학 관련 학과들이 폐과된 경우도 없고 또 인문학 교양과목들도 다양하게 개설되고 있다.

그러나 대학과 사회 전반에 걸쳐 깊은 인문적 지성으로 우리 삶의 꼴을 섬세하게 살피는 글이나 논의는 좀처럼 만나기 힘들다. 많은 교수들은 +인문적 가치와의 연관성이 없거나 희박한 전공지식에 갇혀 있으며, 대부분의 학생들은 실용지식의 습득에만 치중한다. 이제 대학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실용지식을 판매하고 자격증을 주는 학원과 별로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문제는 인문학 자체의 쇠퇴라기보다 인문학 내부에서조차인문적 지성이 빈곤해져가는 데 있는 것 같다.

인문학에 대한 옹호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인간적 가치를 추구하는 학문이라는 점에 근거한다. 인문학의 목적은 지식이 아니라 덕성이다. 여러 가지 지식은 지혜롭고 고상하며 도덕적인 인간, 즉 전인적 인간이라는 르네상스적 인간상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일 따름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학에서는 인문과목들조차 많은 경우 도구적 지식에 +머물고 있다. 그래서 전문지식인들은 많아도 인문적 교양을 갖춘 지성인은 좀처럼 만나기 힘들다.

인문적 지성의 빈곤현상은 그 나름대로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도구적 이성에 입각한 과학기술이 지배력을 행사하고, 즉각적인 현실적 효용성이 절대시되는 세상에서 인문학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사회, 복잡하고 다원화된 사회, 무한경쟁 속의 사회에서는 전문적이고 실용적인 지식이 요구된다. 대학이 사회의 이런 요구를 외면할 수는 없다. 더구나 이미 엘리트교육이라기보다는 대중교육이 되어버린 대학교육이 사회의 요구를 무시하고 전인적 인간의 양성에만 치중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현실에 맞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대학이 인문적 지성을 폐기처분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대학은 전문적이고 실용적인 지식 교육과 인문교육을 조화시켜나가야 한다. 동일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이해라 할지라도 과학적 이해 방식과 인문적 이해 방식은 다르다. 대강 이야기해서, 과학적 이해가 분석적이고도구적인 이성에 의존한다면, 인문적 이해는 보다 직관적이고 심미적인 이성에 의존한다. 그리고 과학적 이해가 가치중립적이고 자기충족적이라면, 인문적 이해는 가치지향적이고 상호주관적이다. 과학이 주어진 문제의 기계적 해결에 유용하다면, 인문학은 그 문제를 전체 맥락 속에서 파악하고 가치를 따지는 데 유용하다. 인문적 지성이 특히 문학이나 예술과 강한 친화성을 가진다는 사실도 이와 연관이 있다.

이런 이유로 인문적 지성과 단절된 전문지식의 득세는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 추구해야할 근본적인 가치를 외면함으로써 우리의 노력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망각한다. 또한 인간이 지닌 인식능력의 절반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고상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감성을 크게 약화시킨다. 이것은 가치의 혼돈을 낳고 삶을 천박하게 방치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인문적 지성이 +가치와 아름다움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천박하고 상투적인 상업대중문화로부터 거짓된 가치와 헛된 아름다움을 교시받을 수밖에 없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화적 비속성도 인문적 지성의 빈곤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인문적 지성이 우리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폭넓은 교양과 고상한 덕성과 감성을 강조하는 것은 오늘날과 같은 무한경쟁, +무한속도시대에 한가한 소리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문적이고 실용적인 지식이 자기 발등을 찍는 도끼가 아닌 따뜻한 집을 위한 장작을 마련하는 데 효율적인 도끼가 되도록하기 위해서도 인문적 지성은 무시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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